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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17. 2020

도道를 아십니까?

3강 장자와 노자 #1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지금은 많이 사라진 듯한데, 한때 거리에서 낯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를 아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답을 찾지 못해 벙어리가 되곤 했다. 사실 그냥 무시하면 될 일이지만, 답할 말을 찾다 보면 어느새 수렁에 빠져버리기 십상이다. 물론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도 적당한 답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도를 아십니까?'라며 질문하는 그들은 이것이 답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장자>는 '도道'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그러나 정작 <장자>라는 책도 별반 유용할만한 답을 들려주지는 않는다. 도리어 난감한 역설을 전하고 있다.


무시無始(시작 없음)이 말했다. "도는 들을 수가 없어. 듣는다면 도가 아니지. 도는 볼 수도 없어. 본다면 도가 아니지. 도는 말할 수 없어. 말한다면 도가 아니지. 형체를 가진 사물에 형체를 부여하면서도 형체를 가지지 않는 것을 알기나 할까? 도는 말할 수 없는 거야." 

무시가 이어서 말했다. "도를 물었는데 대답한 사람이 있지? 도를 모르는 거야. 도를 물었던 사람도 역시 도에 대해 듣지 못했지. 도는 물을 수 없고, 물어도 답할 수 없어. 물을 수 없는데도 묻는다는 건 끝없는 것을 묻는 거지. 답할 수 없는데도 답하는 것은, 도를 가지지 못했다는 거야. 도를 얻지도 못하고 끝없는 것을 묻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밖으로는 우주宇宙를 보지 못하고 안으로는 태초太初를 알지 못하지. 이러니 곤륜崑崙을 넘지 못하고, 태허太虛에 노닐지도 못하는 거야."

無始曰:「道不可聞,聞而非也;道不可見,見而非也;道不可言,言而非也。知形形之不形乎?道不當名。」無始曰:「有問道而應之者,不知道也。雖問道者,亦未聞道。道無問,問無應。無問問之,是問窮也;無應應之,是無內也。以無內待問窮,若是者,外不觀乎宇宙,內不知乎太初,是以不過乎崑崙,不遊乎太虛。」


마치 선문답과 같은 말이다. 이 문장을 붙잡고 골똘히 생각하면 끝도 없지만, 일단 간단히 짚어볼 수 있는 내용부터 하나씩 정리해보자. <장자>는 '무시無始(시작 없음)'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빌어 도에 대해 묻는 것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한다. 도를 묻는 자도, 도에 대해 답하는 자도 도를 알지 못한단다. 그러니 '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에 우물쭈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것이 잘못은 아니다!


무시는 도는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와 지각을 넘어 절대적 세계에 도가 있다. <주역 계사전>의 표현을 빌리면 '형이상形而上'이야말로 도를 설명하는 적합한 표현이라 하겠다. "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 이 문장을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조금은 비겁한 방법을 빌리자. "'형이상'을 일러 '도道'라고 하고, '형이하'를 일러 '기器'라고 한다." '형이상'이란 형체로 잡히지 않는, 무어라 지칭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는 구체적인 사물(器)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무엇이라 일러 말할 수도 없다.


형체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또한 형체를 가진 존재들에게 형체를 부여한다.(形形之不形) 따라서 '도'는 만물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무시가 '도'를 이야기하면서 우주宇宙와 태초太初를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는 우주처럼 세계 전체를 감싸 안으면서, 태초라는 표현처럼 만물의 시원始源으로 모든 것 아래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한자漢字의 대부분이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形)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형체가 없는 것(不形 / 形而上)을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건은 당연하다. 그것은 '이름'을 갖지 않는다.(道不當名) '도'라는 것은 그저 어쩔 수 없이 붙여놓은 이름표에 불과하다. 


<노자>의 유명한 말도 이러한 관점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여겨졌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역, 21쪽


오늘날 통용되는 <노자>의 첫 시작을 여는 문장이다. 이어지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다는 점을 짚어두자. 그만큼 <노자> 해석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노자> 역시 사물의 근원으로서, 또한 이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한걸음 떨어져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노자는 도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라고 묻지 말고 '노자가 말한 도란 무엇인가'라고 바꾸어 물어보자.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도'란 말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어째서 '도'에 대해 말할 수 없는가? <노자>는 뚜렷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최진석은 이 문장에서 유/무의 대립적인 세계관에 초점을 맞춘다. 일반적으로 <노자>를 해석할 때 '무'에서 '유'가 생겨났다 해석한다. <노자> 40장이 그 근거로 사용된다.(40: 天下萬物生於有,有生於無。) 그러나 최진석은 이 문장을 '천하만물이 유에서 생겨난다'라고 풀지 않고 '천하만물이 유에서 산다'라고 풀이한다. 과연 어느 해석이 옳을까? 최진석은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다고 말했지만 노자를 무덤에서 꺼내어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이런 해석의 시도는 기존의 해석을 접어두고 다른 식의 접근도 가능함을 시사하고 있다.


'노자가 말한 도는 무엇인가?' 이 질문이 유효하다면 '공자가 말한 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가능하다. <논어>의 유명한 문장을 보자. ‘朝聞道夕死可矣’ <장자>의 해석을 참고하면, 신묘한 도라는 개념을 알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논어>에서 '도'는 보통 '邦有道', 즉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상황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였다. 그 반대의 표현을 익히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무도無道', 어지러운 시대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문장에서 공자가 듣고 싶다는 '도'란 그런 정치적 이상이 표현되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라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맹자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말하며, 통치 방법을 의미하는 뜻으로 '도'를 말하기도 했다. <대학>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대학지도大學之道', 이를 '큰 배움의 법칙' 혹은 '큰 배움의 원리'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큰 배움의 방법' 혹은 '큰 배움의 가르침'이라는 식으로 보다 소박하게 해석할 수도 있다. 


송대의 성리학자들이야 말로 '도'라는 말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도학자道學者’라 일컬으며 '도'에 관해 다양한 논의를 펼쳤다. 이때의 '도'란 천도天道, 즉 우주적 법칙을 의미했다. 이것은 자연적 법칙을 의미하는 동시에 윤리적 가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발전상을 보면 알 수 있듯, 후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천도天道란 천리天理, 우주적 윤리 준칙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도'란 학자마다 시대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도'라는 거대한 통일된 개념을 모두가 공유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철학 역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다. 따라서 '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대체 누구의, 어디서 말한 도를 이야기하는 거냐고. 모든 심오한 가르침을 '도'라는 말로 퉁칠 것이 아니라 조금은 조심히 구체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시대와 조건, 텍스트의 차이를 무시하고 '도道'라는 글자를 문자 그대로 받들어 숭상한다면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마구 뒤섞어 버리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어 <신약성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太初有道,道与神同在,道就是神" 직역하면 이렇다. "태초에 도가 있었다. '도'와 신이 함께 있었다. '도'가 바로 신이다." 뭔가 대단히 심오한 세계를 열어줄 것처럼 보이지만, '도'가 한국어 성서에서는 '말씀'으로 번역된다는 사실은 가려지고 만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대적, 사회적 조건에서 읽지 않고 눈에 보이는 문자만을 붙들고 늘어진다면, 해괴한 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장자>나 <노자>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도가道家를 일러 노장학老莊學이라고도 부른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의 대표적인 사상가라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장자>와 <노자>를 읽으면 도가라는 커다란 해석의 테두리 안에서 이 두 텍스트를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도가라는 울타리를 걷어내고 보면 이 둘이 과연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노자가 말한 도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노자'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또 사마천의 도움을 빌어야 한다. <노자한비열전>에서 노자의 생애를 기술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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