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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17. 2020

노자의 신화

3강 장자와 노자 #2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사마천은 <노자한비열전>에서 노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노자한비열전>은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노자와 한비자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여기에는 장자와 신불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더 들어 있다. 따라서 혹자는 이 넷의 이름을 따서 <노장신한열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앞에서 보았던 장자의 일생도 이 글에 실려 있다. 


노자와 장자를 하나의 이름으로 묶은 것은 이 둘이 도가道家의 주요 인물이라 보았던 까닭이다. 과연 이 둘을 도가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느냐, 이 문제는 차차 다루기로 하자. 도리어 눈을 돌려보아야 할 것은 한비자와 신불해라는 인물이다. 이 둘은 각각 법가法家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어째서 사마천은 도가와 법가를 한데 묶어 놓은 것일까?


흔히 도가는 자연을 노래하고 자유를 찬양한 학파로, 법가는 가혹한 형벌과 통제를 이야기한 학파로 이야기한다. 이렇게 보면 도저히 함께 놓을 수 없는 두 학파를 한데 묶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대로 보아도 이 넷을 하나로 묶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나 힌트를 삼을 수 있는 게 있다면 <한비자>에 <해노解老>, 즉 <노자>를 해석한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 한비자는 <노자>의 최초 연구자였다.


이러한 사실은 법가가 도가의 어떤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일단 이 질문을 가지고 노자라는 인물의 생애를 살펴보도록 하자.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이다.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었다. 그는 주나라의 책을 관리하는 사관이었다. 공자는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다. ... 공자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잘 날고, 물고기는 잘 헤엄치며, 짐승은 잘 달린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로 잡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고 낚고, 하늘의 새는 화살을 쏘아 잡는다. 이것들에 대해서 나는 잘 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지 알 수 없다. 오늘 내가 만난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인물이었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고 스스로의 학문을 드러내지 않았다. 헛된 이름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주나라에 살다가 주나라의 쇠락을 보고는 주나라를 떠나 서쪽으로 갔다. 함곡관에 이르자 관령 윤희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세속을 떠나 은둔하신다니 제발 저에게 글을 남겨주십시오."

노자는 <도덕경> 상, 하편을 지어 '도'와 '덕'의 뜻을 5,000여 자로 정리했다. 그러고 떠나서는 그 뒤로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 노래자老萊子도 열다섯 권의 책을 지어 도가의 학설을 이야기하였는데,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한다.

노자는 160살 혹은 200살을 살았다고도 한다. 이는 그가 '양생'의 방법을 터득했던 까닭이다

사서史書의 기록에 따르면 공자가 죽은 뒤 129년 되던 해, 주나라 태사太史 담儋이 진나라 헌공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주나라와 합쳐졌다가, 500년이 지나면 나뉘고, 나뉜 뒤 70년이 지나면 패왕이 나올 것입니다."

담이 바로 노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아는 이가 없다. 노자는 은둔하는 인물이었다. 

노자의 아들 이름은 종宗인데, 위나라 장군이 되어 단간을 봉지로 받았다. 종의 아들은 주注이며, 주의 아들은 궁宮, 궁의 현손은 가假인데 한나라 효문제를 섬겼다.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의 태부로 제나라를 다스렸다. 

... (이하 생략) ... 


앞에서 보았던 장자나 맹자 등의 서술에 비해 매우 복잡하다. 여러 이야기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대관절 노자는 누구인가? 최소한 세 사람의 노자 후보군이 있다. 1) 이이李耳라 불리는 주나라의 사관 2) 노래자老萊子라는 초나라 사람 3) 주나라 태사太史 담儋. 한편 비현실적인 이야기도 있다. 160살 혹은 200살을 살았다는 기록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노자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을 생각하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를 별로 서술하지 않았다.


이는 사마천이 노자에 대해 전해지는 다양한 기록을 취합하여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 사람이 노자라 하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 저 사람이 노자라 하기도 하고. 따라서 전해지는 이야기의 파편들만 있을 뿐 구체적인 역사적 실체를 가진 노자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일부 연구자는 노자에 대한 사마천의 기록을 역사적 기술로 볼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신화로 보아야 하며 여기에 드러난 상징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노자> 혹은 <도덕경>이라는 책에 대한 전설도 마찬가지이다. 사마천은 쇠락하는 주나라를 떠나며 지은 책이라고 말한다. 이 짧은 글을 남기고 노자는 함곡관을 넘어 사라졌다. 여기서 함곡관이라는 지명이 중요한데, 함곡관은 관중關中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골목이었다. 즉, 주나라를 떠난 노자는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편 이야기의 다른 조각을 보면 그는 진나라가 주나라를 흡수할 것을, 이어서 패왕이 등장할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런 전설을 참고하여 김시천은 <노자>가 통치술의 비밀을 전하는 책이라 주장한다. <노자>는 앞으로 천하의 패권을 쥘 잠재적인 대권 후보, 혹은 이미 지고의 제왕의 자리에 올라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을 위해 서술한 책이다. 호모 임페리알리스(homo imperialis)가 <노자>가 목표로 한 독자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당혹스럽다. 무위자연을 노래한 그는 어디에 갔는가?


사실 이런 비슷한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노자>가 병법가들의 교훈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라는 주장, 역설적인 통치술에 대해 서술했다는 주장 등등. 이런 입장을 참고하면 사마천이 한비자와 함께 엮어 노자를 서술한 까닭을 알 수 있을 법하다. 한비자는 춘추전국 말 출현할 새로운 권력의 모델에 관심을 두었다. 진시황이 그의 학설을 읽고 그를 만나기 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노자에 대한 신화, 신선과도 같은 그의 인상을 지우고 <노자>의 문장들을 해석해보자.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의 속성과 지배술의 비밀의 이야기한 책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면 어떨까. 또 다른 노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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