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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17. 2020

권력의 기술

3강 장자와 노자 #3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노자>는 난해한 책이다. 불과 5,000여 자 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일종의 철학적 격언, 철학적 비유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똑같은 문장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이 엇갈리기도 한다. 이런 형식적 특징 이외에, 저자와 독자가 감추어져 있다는 점도 난해함을 더하는 이유가 된다.


예를 들어 <노자>라는 제목을 지우고 <노자> 본문을 읽으면 대체 누구의 글인지 알 수가 없다. <노자>에는 노자가 없다. 이런 까닭에 노자에 대한 신화를 지우고 <노자> 본문을 읽어볼 것은 제안하는 바이다. 또한 노자의 독자는 누구인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일차적으로 저자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논어>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기록으로, 이후 공자의 문도門徒가 될 사람들이 일차적인 독자이다. <맹자>는 여러 제후들을 상대로 한 대화가 만은 것처럼 향후 천하를 다스릴 치자治者를 위한 책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떨까? 아는 장자의 태도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앞서 보았듯 장자는 자신에게 부와 권력을 주겠다는 이를 물리친다. 그는 그것이 순수한 제안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한편 장자가 곡식을 빌러 친구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는 어떤가. 그가 겪은 삶은 가난과 맞닿아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왕에게 받은 상을 자랑하는 친구를 비꼬며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왕의 고름을 빨아주고, 치질을 핥아주는 자에게 천금을 내린다고 하더니..." 그는 권력의 바깥에 있었으며, 통상적인 상식과 규범의 세계 너머에 있었다.


그러나 거꾸로 <노자>에는 왕王에 대한 교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자> 37장을 보자.


道常無為而無不為。侯王若能守之,萬物將自化。化而欲作,吾將鎮之以無名之樸。

'도'는 항상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후왕侯王이 이 이치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교화될 것이다. 교화된 뒤에 무엇인가 하겠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도구(樸)로 그를 누를 것이다.


여기서 후왕은 '무위이무불위無為而無不為'의 법칙을 지키는 존재이다. 이 구절을 해석할 때 '무위無為'자체, 즉 통치 행위가 없음에 주목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이면이 존재한다. 바로 '무불위無不為', 즉 하지 못함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무위이무불위'란 마치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지 못하는 일 없이 어떤 일이든 이루어 낸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 하려고 하면 할수록 못하게 되지만, 하려고 하지 않을수록 - 아무 행위가 없으면 도리어 하려고 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不出戶知天下;不闚牖見天道。其出彌遠,其知彌少。是以聖人不行而知,不見而名(明),不為而成。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며, 창문을 열고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본다. 멀리 나갈수록 아는 것이 줄어든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다니지 않고도 알며, 보지 않고도 지혜롭고, 하지 않고도 이룬다.


이 역설의 비밀을 체득한 사람이 '성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위이성不為而成' 역시 마찬가지이다. 행동은 성취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나. 자리를 떠나 스스로 나서서 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 자리야 말로 천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권력의 자리는 다양한 정보가 몰려드는 그곳이다. 


이는 일종의 정보 독점, 정보의 비대칭을 전제하고 있다. 권력은 가만히 앉아서 다양한 정보를 취득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몰래 듣고 몰래 엿본다. 만약 그렇지 않고 스스로 돌아다며 정보를 취합하고, 스스로 내다보며 살핀다면 어떻게 될까? 움직일수록, 스스로 나설수록 알 수 있는 것이 줄어들 뿐이다. 권력의 비대칭 가운데 권력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권력을 작동시키는 기술, 이것이 바로 <노자>가 들려주는 핵심적인 교훈이다.


따라서 <노자>에서 말하는 '도'란 이런 초월적 자리, 즉 권력이 작동하는 비밀스런 방법을 가리키는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사변적인 철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권력의 현장에서 얻은 구체적인 교훈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도'란 말로 전해질 수 없는 것일까?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입에 올리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권력을 유지하고 다루는 기술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강신주는 <노자>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교환의 논리'를 서술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교환이란 동일한 가치를 주고받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교환의 논리 속에 누군가는 착취당하며, 누군가는 더 큰 이득을 얻는다. 교환이란 보이지 않는 수탈의 다른 이름이다. 


將欲歙之,必固張之;將欲弱之,必固強之;將欲廢之,必固興之;將欲奪之,必固與之。是謂微明。柔弱勝剛強。魚不可脫於淵,國之利器不可以示人。

줄어들게 하고 싶다면, 반드시 늘려주어야 한다. 약하게 하고 싶다면, 반드시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망가뜨리고 싶다면, 반드시 잘 되게 해주어야 한다.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주어야 한다. 이것을 일러 감춰진 지혜라고 하겠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가 연못을 벗어나지 말아야 하듯, 나라의 날카로운 도구를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將欲奪之,必固與之。" 빼앗고 싶다면 주어라! 오늘도 몇 통의 친절한 전화를 받았다. 누구는 나에게 대출을 해주겠다고 권하고, 누구는 핸드폰을 바꾸어준단다. 예전에는 무슨 선물을 보내준다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잘 안다. 이들의 '목적'이 다른데 있음을. 이들이 나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얻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교환의 논리'라고 하지만 이때의 '교환'이란 '기브 앤 테이크', 즉 단순히 주고받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미덕은 주고 더 많이 받아내는 것이다. 국가의 논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권력은 늘 비대칭적이다. 이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 '미명微明'이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통치자가 무력을 통해 백성들을 착취한다면 어떨까. 처음엔 가능하겠지만 반복될수록 거센 저항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정말로 날카롭고 예리한 이 기술을 일반 백성이 알도록 해서는 안 된다. (國之利器不可以示人。) 이를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民不畏死,奈何以死懼之?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죽인다는 것으로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면? 이것이 가장 두려워할 것이다. 따라서 이 비밀은 소수가 독점해야 하며, 이 목적은 늘 감춰져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기술, 여기에 권력을 유지하는 비법이 숨겨 있다. <노자>의 '도'란 이 비밀을 포괄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통치자는 '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눈을 돌려 그 목적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무위無為'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무불위無不為'라는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역설적이면서 핵심적인 방편인 셈이다. 


道常無為而無不為

'도'는 항상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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