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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17. 2020

만세토록 가기를

3강 장자와 노자 #4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노자>의 성립 연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사마천의 기록을 참고하면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 인물이니 춘추시대의 저작이라 볼 수 있다. 공자문례孔子問禮,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기록을 참고하여 <노자>가 <논어>보다 앞선 텍스트라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노자에 대한 신화적인 해석을 걷어내고 보면 <노자>의 성립 연대는 더 후대가 되어야 한다. 


중국 역사를 보면 춘추전국은 하나의 거대한 혼란기였지만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통치 권력을 낳는 시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인물로 진시황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으며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처음 만든 인물이었다. <사기>에는 황제라는 칭호에 얽힌 논쟁이 실려 있다.


진왕은 천하를 통일한 이후, 역사이래 유래 없는 업적을 세웠다고 자부하며 새로운 칭호가 필요하다 주장한다. 이에 신하들이 올린 칭호는 태황泰皇이었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았던 진왕은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스스로 만든다. 그리고 역사의 평가에 따라 시호를 받지 않겠다며 스스로를 시황제로 자처한다. 이어서 이세황제 나아가 만세까지 가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시황제는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도 새롭게 바꾼다. '짐朕'이라는 호칭이 그때 만들어진다. 짐朕에는 '조짐'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황제란 그런 존재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 표정을 지운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군림하는 권력이 바로 황제이다. 


시황제는 불노불사를 추구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져보면 시황제 이전에도 불노불사에 대한 욕구는 있었을 것이다. 늙음과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대하는 것과 이를 넘어 영원을 욕망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최초의 황제는 이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거꾸로 말하면 시황제가 욕망한 것은 자기 일신의 생명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제국이 황제라는 자리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만세토록 영원히! 


한무제도 영생에 탐닉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선술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진시황과 한무제 이후 신선을 꿈꾸는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비법을 탐닉했다. 이를 통칭하여 양생술養生術이라 부른다. '양생'이란 삶을 가꾼다는 뜻이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오해, 신선술 - 도가의 수련이 자연을 따르는 것이라는 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신선술이란 생장소멸生長消滅이라는 자연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노자>는 이런 양생술의 비법을 담을 텍스트로 여겨졌다. 앞서 사마천이 노자를 설명하며 그가 수백 살을 넘게 살았다고 이야기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실제로 <노자> 안에서는 역원에 대한 욕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天長地久。天地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故能長生。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外其身而身存。非以其無私耶?故能成其私。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하늘과 땅이 영원한 것은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토록 영원히 살 수 있었다. 따라서 성인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야 자신을 내세울 수 있다. 자신을 무시해야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사사로움이 없애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노자>의 역설은 늘 이쪽과 저쪽이 교차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노자>는 역설의 방법을 통해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천지와 같이 영원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서지 말아야 하며, 스스로를 보존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지신의 사사로운 욕망, 영원히 지속되고자 하는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자>의 유명한 문장 '道可道 非常道' 역시 다르게 읽을 수 있다. '도'를 일컫지 못하는 것은 그 초월적이며 사변적인 요소 때문이 아니라 '상도常道', 늘 일정한 영속적인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정함이야 말로 <노자>가 목표로 하는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이다.


知常容,容乃公,公乃王,王乃天,天乃道,道乃久,沒身不殆。

일정함을 알면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임이란 공평함이며 공평함은 곧 왕 노릇 함이다. 왕 노릇 함이란 하늘의 일이고 하늘의 일은 곧 '도'이다. '도'는 오래가니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노자>는 '도'의 주요한 속성 가운데 일정함(常), 다르게 말하면 영원함(長久)에 주목했다. 이는 비대칭의 현실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 삶이 그대로 지속되기를 바랄까?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은 이 삶이 어서 그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太上,下知有之;其次,親而譽之;其次,畏之;其次,侮之。信不足焉,有不信焉。悠兮,其貴言。功成事遂,百姓皆謂我自然。

최고로 좋은 것은,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통치자에게 친밀함을 느끼고 칭송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통치자를 두려워하는 것이며, 그다음은 통치자를 무시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불신이 있기 마련이다. 아! 귀한 가르침이여. 일이 이루어지더라도 백성들 모두 '우리는 본디 그랬어(我自然)'라고 하는구나.  


감추어 드러나지 않는 통치자. 그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 그치기를 바란다. 나아가 아예 잊힐 수 있다면 더욱 좋으리라. 그렇게 되면 '자연自然', '우리는 본래 그랬어'라고 생각한단다. 백성은 이 거대한 권력 체계의 일부가 되어 아무런 불만도 아무런 불편도 없는 상태에 이른다. 


자연스러운 작동. 바로 이렇게 해야, 하늘과 땅이 영원하듯 영속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천장지구天長地久란 바로 이런 뜻이다. 자연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속성을 빌어, 그 욕망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노자>에서 말하는 양생이란 이 욕망의 지속적인 추구를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이를 '자연自然'이라 이름 붙였다. 이는 자연적 법칙을 거스르는 것인 동시에 또 다른 '자연' -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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