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장자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픈옹달 Nov 17. 2020

삶의 끝에서

3강 장자와 노자 #5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장자>에도 '양생養生'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바로 <양생주> 편이 그것인데, 이 편은 다른 편보다 분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한 편의 상세한 우화가 중요한 줄기를 이룬다.


<양생주>의 시작은 이렇다.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殆已 已而為知者 殆而已矣

우리 삶은 한계가 있지만 앎은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로울 뿐이다. 그런데도 알겠다고 한다면 위태로울 뿐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한다. 그러나 앎은 무한하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서 장자는 무한한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생의 한계를 인식하고 살아갈 것을 주문한다. <노자>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영원에 대한 욕망을 발견하기 힘들다. 도리어 그런 영원함을 추구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장자는 앎을 포기하고 이 한계에 순응하는 것만을 주장하는 것일까?


<노자>에게 역설이 있듯 장자에게도 역설이 있다. 그가 앎을 부정한 것처럼 보이나, 앞서 보았듯 장자는 다른 앎을, 다른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는 다른 깨달음을 통해 다른 삶의 윤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노자>에게 물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질문을 돌리자. 그 깨달음의 목적은 무엇인가?


為善无近名 為惡无近刑 緣督以為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선을 행하더라도 명성을 얻는데 이르지 말라.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을 받는데 이르지 말라. 중용을 법칙으로 삼아 행동하면 자신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삶을 온전히 살고, 부모를 잘 봉양하고, 수명을 다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적당히 대충 살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이를 앞에서 보았던 장자의 시대 위에서 해석해보자. 그의 시대는 한때 명성을 얻더라도 일순간 몰락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가혹한 형벌을 받아 몸을 다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시대의 폭력을 피해 삶을 잘 보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可以盡年, 어떻게 하면 주어진 수명을 다 살 수 있을까.


이를 앞에서 <노자>가 말했던 장생불사와 같은 의미로 오해하지는 말자. 장자는 삶이 유한하다고 인식한다. 그는 이 유한한 삶을 긍정하되 이를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 중간에 베어지는 나무들을 기억하자. 장자가 인식한 세상은 도끼질이 횡횡하는 세상이었다. 칼날이 번뜩이며 내 목숨을 노리는 시대에 나에게 주어진 삶 전체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삶을 가꾸는 법(養生)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노자>가 말한 장생불사도 아니며, 공자가 지향했던 입신양명도 아니고, 맹자가 말한 살신성인의 정신과도 다르다.


어찌 보면 장자의 삶은 막다른 골목에 놓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은 포악하며 각 개인은 연약하다. 날카로운 칼날에 저항하기보다는 이를 피해 사는 법을 간구해야만 한다. 한계 지어진 유한한 삶에서 출발하여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질문을 던진다. 삶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삶의 윤리는 절실하면서도 보편적이다. 


이어서 포정의 고사가 등장한다.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았다. 칼에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누르고, 무릎을 구부리며 소를 베었다. 소를 써는 소리가 음악에 어울렸고 그의 모습은 무희들의 춤과 어울렸으며, 그렇게 리듬에 따라 몸을 놀렸다. 문혜군이 그를 보고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훌륭하도다! 기술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

포정은 칼을 놓고 말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보다 더 빼어난 것입죠."


여기서 문혜군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마 <장자>의 실재하는 인물 이리기보다는 우화의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혜군이라는 군주가 포정庖丁, 즉 백정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낯선 상황이다. 사실 이 둘이 대화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왕좌에 앉은 군왕이 어찌 백정 따위와 말을 섞겠는가.


그러나 장자는 기존의 권력관계를 뒤집어 놓는다. 유명한 윤편의 고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환공과 윤편 - 바퀴 깎는 노인이라는 이 둘의 대칭 역시 우화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장자는 포정과 윤편의 지혜를 말한다. 천한 신분, 책도 읽지 못했을 그들을 통해 장자는 어떤 깨우침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장자는 의도적으로 전도된 권력관계를 통해 뻔한 주장을 전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장자는 권력의 비대칭을 우화의 한 속성으로 이용하고 있다. 우화를 통해 권력을 쥔 군왕은 청자聽者의 자리에 앉게 된다. 하찮은 인물들을 통해 전하는 기묘한 이야기. 여기에 장자의 매력이 있다.  


문혜군은 포정의 재주에 넋을 잃는다. 그의 행동 하나가 음악에, 무희들의 춤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어찌 저렇게 신묘한 재주를 지니고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포정은 자신의 재주가 아니라 '도'를 이야기한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도'가 문제이다. 질문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제 이 둘의 대화는 '도'에 대한 철학적 우화가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만세토록 가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