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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17. 2020

칼을 들어 세상을 내리치다

3강 장자와 노자 #6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포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처음 제가 소를 잡을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죠. 눈의 감각을 멈추니 정신의 자연스러운 작용만 남습니다.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천리天理를 따라 칼을 놀리고 움직이며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를 따라갑니다. 그렇게 세심하게 움직이면= 살이나 뼈가 다치지 않습니다. 하물며 큰 뼈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솜씨 좋은 소잡이는 1년마다 칼을 바꿉니다. 살을 가르기 때문입죠. 평범한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뼈를 자르니까 그렇습죠.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었답니다. 수천 마리 소를 잡았지만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갈아 낸 것처럼 날카롭습니다. 저 뼈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데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19년이 되었지만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갈아낸 듯 날카롭습죠.


소라는 거대한 동물을 대하면서 처음에는 온통 소 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의 부분 부분을 나누어 볼 뿐만 아니라 소를 자유자재로 해체하는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오죽하면 19년 동안 칼을 썼지만 막 숫돌에 갈아낸 것처럼 새 것 일 수 있을까. 포정의 말을 들은 문혜군은 이렇게 탄식했단다. "대단하구나!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을 알게 되었다." 포정의 칼 솜씨에 넋을 잃지 말자. 우리는 포정의 비유를 통해 양생의 비밀을 발견해야 한다.


19년간 사용했으면서도 상하지 않은 칼, 이 칼은 유한한 인간의 생명을 의미한다. 칼을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칼날의 수명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한 달을 쓰기도 하고, 한 해를 쓰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서 포정이 상대하는 소는 다양한 문제로 얽혀 있는 문제 덩어리, 굳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현재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현실을 살아내더라도 누구는 쉬이 다치고 망가지는가 하면, 누구는 자신의 삶을 잘 가꾸어(養生) 살아간다. 


장자는 그 차이가 틈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포정은 그 틈을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틈에 칼날을 넣어 칼을 휘두를 것. 근육과 뼈 사이에 틈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근육과 뼈란 유한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여러 장애물을 비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피해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이 쉽지 않은 것은 그 틈이라는 것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라는 데 있다. 도리어 눈으로 보는 것을 멈추라고 제안한다. 통상적인 감각 기관에 의지하지 않아야 이 틈을 알 수 있다 말한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일컬어지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길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이며, 들어보지 않은 길을 어떻게 갈 것이며, 말할 수 없는 길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포정의 비유는 구체적이고 실재적이다. 윤편, 바퀴 깎는 노인의 고사를 기억하자. 그가 말한 적당히 바퀴를 깎는 정도에 대해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의 순간이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 수 있다. 언어화할 수 없다고 하여 그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포정은 자신이 발견한 틈이 어딘지 손으로 짚어 가리킬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아니, 설사 포정이 여기라고 보여주고 설명하더라도 보지 못하고 들을 수 없다. 그러나 포정은 그 틈으로 칼날을 노닐며 살과 뼈를 베어낸다. 그 틈은 지각되지 않지만 실재적이다. 이 비밀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직접 경험하는 길이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다. 포정에게도 19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누군가의 말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길이 전수될 수 있었다면 누구나 단번에 그 길을 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전해질 수 없다. 아니, 전해주어도 받을 수 없다. "도는 전할 수 있지만 받을 수 없고, 얻을 수 있지만 내보일 수 없다.(夫道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직접 해봐야만 한다. 경험의 장에서 직접 몸으로 겪는 것 이외에 방법은 없다. 장자가 다양한 숙련공을 우화에 등장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직접 몸으로 부딪혀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들이 보는 세계는 분명 다르다. 말 그대로 삶의 지혜라 부를 만한 것이 거기에 있다. 권력의 기술도 아니고, 어떤 이론도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시간을 경험한다고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자. 만약 그렇다면 포정은 얼마간의 시간을 투자하라 일러주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언제 그것이 가능한지 일러주지 않는다. 끝없는 시도 끝에 어느 순간 도약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정이 말하는 양생은 투철한 삶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할 수 있다. 유한한 삶, 한정된 시간 속에서 다른 것을 경험하고 체득하려면 온 몸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양생주>는 노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담, 노자는 삶과 죽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다. 장자는 누구도 생사의 수레바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 속박 속에서 자유를 이야기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우리는 또 다른 틈을 발견할 수 있다. 유한한 삶을 벗어나 무한한 삶을 누리는 것은 도리어 '삶' 자체에 갇힌 것 아닌가. 유한한 삶을 긍정하고 수용하되 이 유한한 세계를 충실하게, 투철하게 사는 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장자의 양생養生은 현재를 이야기한다. 아득한 영원 대신,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어떤 사태와 사태의 틈에 번뜩이며 등장하는 찰나의 길에 주목한다. 따라서 그 길은 모두의 보편적인 길이 될 수 없으며 영원하지도 않다.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 각각 손에 쥔 칼을 어떻게 놀릴 것인가. 틈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혹자는 장자에게 안명安命, 운명에 대한 순응만 있을 뿐이라 비판한다. 혁명革命, 운명을 전복하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 장자는 세상에 도끼 칼날이 번뜩인다 말했다. 그러나 그는 요리조리 피하는 것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 손에도 칼이 있다. 이 칼을 들어 세상을 내리치면 어떻게 될까. 저마다 칼을 들어 세상을 내리친다면 그 세상의 모습이 어떨지 참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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