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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24. 2020

사마천 역사-史記를 쓰다

4강 장자와 사마천 #1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人固有一死, 死有重於泰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趨異也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습니다. 그러나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깃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있기도 합니다. 목표한 바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보임안서報任安書>


사마천은 기구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태사령에 오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어려서부터 사관이 되기 위한 교육을 충실히 받았다. 10살이 넘자 고문을 익혔으며, 철이 들 무렵에는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직접 역사적 현장을 탐방하기도 했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여러 차례 위험을 겪었다고 말한다. 


수년간의 답사를 마치고 그는 낭중이라는 관직에 임명된다. 황제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남쪽 멀리 떠나기도 했다. 아마도 여러 곳을 돌아다닌 경험 덕택에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처럼 사마천은 동서, 남북을 가로지르며 드넓은 천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먼 여행길에 돌아오는 도중 안타까운 비보가 전해진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는 화병으로 몸져누워있었다. 당시는 한나라 무제 시기였는데, 무제는 봉선의식을 치르고자 했다. 봉선의식이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천하를 대표한다는 상징적 의식이었다. 고대의 성왕들이 봉선의식을 치렀다고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첫 번째 황제, 시황제가 봉선의식을 치르기를 시도하지만 결국을 실패한다. 육국을 정벌하고 천하를 통일한 공이라면 충분히 봉선의식을 치를 수 있을 법하였으나 그의 제국은 그렇게 탄탄하지 못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진시황이 봉선의식을 치르러 산에 오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제사를 치를 수 없었다고 한다.


진秦이 무너지고 한漢을 세운 고조, 유방은 봉선을 치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말 위에 내려 천하를 통치하는 황제가 되었다지만 그는 여전히 말 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반란을 일으킨, 혹은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공신들을 처치하느라 말에서 내릴 수 없었다. 토사구팽의 전쟁터에서 그는 말년까지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이어 여치呂雉, 여태후가 권력을 잡는다. 유방과 여치의 아들 혜제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고, 혜제가 사망한 이후 제위에 오른 어린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유방은 세상을 떠나기 전 천하가 유씨劉氏의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유방의 죽음과 동시에 여씨呂氏 천하의 시대가 되었다. 황제의 외척이 권력을 손에 쥔 것이다. 그러나 여태후 사후 여씨천하도 금세 붕괴하고 만다. 이렇게 공신 세력이 숙청되고 외척 세력도 꺾였다. 이어서 제위에 오른 문제와 경제 시기에는 친족들이 문제였다. 경제 시기에 벌어진 오초칠국의 난은 한나라를 크게 뒤흔들었으나 다행히 진압되었다. 


이어서 제위에 오른 무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통치할 수 있었다. 무제가 치세를 연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무제가 봉선의식을 치르고자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태사령이었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자신이야 말로 이 역사적인 현장에 참여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마'씨 집안은 대대로 '태사'라는 직위를 물려받았고, 이 태사는 '천문을 읽는' 관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사마담은 봉선의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우리 조상은 주나라 왕실의 태사太史였다. 아주 먼 옛날 우 임금과 하 임금의 공명이 세상에 드러난 이래로 천문을 주관해왔다. 점차 시간이 흘러 쇠락하더니, 나에게서 이 일이 끊어지고 마는 것 일까? 너는 나를 이어 태사가 되어 우리 조상의 일을 이어가야 한다. 지금 천자께서 천 년의 대통을 이어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치르는데도 나는 따라가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겠지. 나의 운명이겠지! 내가 죽거든 너는 꼭 태사가 되어라. 태사가 되어 내가 쓰려던 것을 잊지 말아라. ...(중략)... 한나라가 세워지자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어 지혜롭고 어진 군주와 충성스럽고 의로운 이들이 나왔다. 그러나 나는 태사가 되어서도 이를 기록하지 못하였구나. 천하에 이것이 잊힐까 염려되고 걱정되는구나. 너는 꼭 이 일을 잊지 말거라."

사마천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비록 빼어난 인물은 아니나 아버지께서 정리해두신 옛 글을 모두 빠짐없이 정리하겠습니다."

<태사공자서>

 

오늘날 천문天文은 과학의 영역에 속해있다. 그러나 사마천 당시에는 별의 운행에서 인간사의 변화를 읽어냈다. 결국 천문을 살핀다는 것은 하늘을 본다는 것인 동시에 이 세상의 커다란 움직임을 본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사마담은 많은 자료를 모아 두고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를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이어 태사령에 오른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게 된 일차적인 동기는 태사라는 직분을 담당해온 사마씨로의 사명의식과 함께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시대야 말로 역사를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고 보았다. 오랜 전란이 끝나고 천하가 안정되었으며, 이제 천하는 새로운 체제를 따라 움직일 것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공이 세상을 떠난 뒤 500년이 지나 공자가 있었고,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500년이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역>과 <춘추>, <시>, <서>, <예>, <악>의 뜻을 밝혀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여기에 있구나! 그 뜻이 여기에 있구나! 내가 어찌 이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태사공자서>


500년마다 성인聖人, 문화적 영웅이 등장한다. 주공이 있었고 공자가 그것을 이었다. 500년이 지난 지금 누가 그 일을 감당할 것인가? 사마천은 바로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할 인물이라 보았다. 이런 인식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무제에 이르러 천하는 안정되었고 한漢은 동서남북으로 제국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렇게 천하, 다르게 말하면 세계는 새롭게 정비되었다. 이 찬란한 위업을 기록해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한무제의 통치기는 '중국' 역사의 중요한 변혁기이다. 제국이 완성되었고, 이 제국을 이끄는 사상과 제도가 마련되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사마천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가문의 사명, 여기에 시대적 사명을 더하여 <사기>를 저술한다. 이런 사명의식이 없다면 <사기>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뿐이라면 <사기>는 여느 역사책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기록에 불과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사마천 개인의 굴절된 삶이 새겨져 있다. 그가 경험한 치역스런 사건은 <사기>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역사의 기록자를 넘어, 위대한 작가로서 사마천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경험한 치욕스러운 사건 때문이었다. 황제의 권력 아래 종속된 자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슬픈 운명이 그에게 다른 글쓰기를 선물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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