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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24. 2020

여기 삶이 있다

4강 장자와 사마천 #3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장자: 인간세>에 이어지는 내용을 더 참고하자.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안합입니다 그는 위나라 영공의 태자를 보좌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를 두고 거백옥이라는 사람과 상의한다. 문제는 태자가 못 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 


거백옥이 답했다. "... 그를 따르더라도 그와 같아져서는 안 됩니다. 그와 어울리되 겉으로 속마음을 내비쳐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따르다가 마음까지 같아지면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그와 어울리지만 속마음을 드러내면 또 화를 입겠지요. 그가 갓난아이처럼 굴면 그와 함께 갓난아이가 되십시오. 그가 철없이 행동하면 그를 따라 철없이 행동하십시오. 그가 제멋대로 행동하면 그와 함께 제멋대로 행동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아무 화를 입지 않아야 합니다. 그대는 사마귀를 잘 아시지요. 사마귀가 팔뚝을 높이 들고 수레에 맞서곤 합니다. 그러나 제가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르지요. 그렇게 제 힘을 뽐내는 것만 아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유명한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나왔다. 수레를 상대하는 사마귀의 무모함. 다시 사마천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사마천이야말로 사마귀와도 같은 무모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황제에게 간언을 하다 결국 황제의 분노를 사서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앞에서 언급했던, 사마천이 역사를 기술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뒤 7년 뒤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이릉이라는 장수를 변호해주었는데 그만 황제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이릉은 사마천이 존경했던 이광이라는 장수의 손자로 한무제 당시에 활발하게 벌어진 흉노 정벌에 참여했다가 전멸당하다시피 전쟁에서 패한 인물이다. 그가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이 궁에 전해지나 한무제는 크게 분노한다.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릉이 승전보를 전할 때에는 다 같이 기뻐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하는 일도, 포로가 되는 일도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일가족을 몰살하라는 명령은 지나친 게 아니냐는 게 사마천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릉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는 그만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결국 사마천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사형을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 50만 냥의 속죄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일이었다. 사마천은 궁형을 택하기로 한다.

 

"이릉과 함께 궁에서 일하기는 했지만, 평소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서로 길이 달라,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없고, 친밀하게 관계를 쌓은 일도 없습니다. ... (중략) ...

제 생각을 다 고하기도 전에 황제께서는 제 뜻을 이해하지 않으시고, 제가 이사장군을 비방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릉을 위해 나선다고 생각하시고는 저를 옥리에게 넘겨버리셨습니다. 진심 어린 충정이 드러나지 못하고 황제를 속였다는 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속죄금을 내지도 못했고, 저를 도와주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황제 주의의 사람들도 저를 위해 한마디 말로 해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형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면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 빠지는 것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작은 벌레만도 못했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절개를 위해 죽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저 어리석어 큰 죄를 지어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 제 평소의 행실 때문이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습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습니다.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지요"

<보임안서>


사마천은 죽음의 목전에서 삶을 선택한다. 어떻게 보면 구차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만약 이릉이 사마천과 각별한 관계라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이릉과 사마천은 별 관계도 없었다. 게다가 사마천은 어떤 대의를 걸고 황제에게 당당하게 이릉을 변호한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삶을 부여잡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런 면에서 사마천의 길은 장자의 길과 정 반대에 놓여있다. 장자가 생사의 문제를 뛰어넘어 애락哀樂, 슬픔도 즐거움도 없는 삶을 추구했다면, 사마천은 도리어 생을 부여잡고 격정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가 경험한 운명, 황제 권력의 무서움은 그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바로 울분鬱憤의 글쓰기!


칠 년 뒤, 태사공(사마천)은 이릉의 화로 감옥에 갇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


그는 물러나 깊이 생각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시경>과 <서경>에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은 마음에 생각한 것을 담아 드러내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 서백은 유리에 갇혀 있을 때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고난을 겪고 <춘추>를 지었다. 굴원은 나라에서 쫓겨나 <이소>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을 잃고 <국어>를 썼다. 손빈은 다리가 잘리고 <병법>을 저술했고, 여불위는 촉으로 쫓겨난 뒤에 <여씨춘추>를 남겼다. 한비자는 진나라의 옥에 갇혀 <세난>, <고분> 편을 지었다. <시경>의 시 300편은 현인과 성인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모두 마음속에 맺혀 있는 울분을 덜어낼 길이 없어 지난 일을 써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였다."

<태사공자서>


사마천은 여기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발분發憤, 말 그대로 마음에서 분이나 견딜 수 없는 상황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겪을 때,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것이 있다. 다른 하나는 울결鬱結,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에 무엇인가 맺혀 풀리지 않는 게 있다. 끓어오르는 마음과 마구 엉킨 마음, 이 엉망이 된 마음을 풀어내기 위해 그는 글쓰기를 선택한다. 사마천은 말한다. 당대에 전해지는 빼어난 글들은 모두 저마다의 좌절 가운데 마음을 풀어내기 위해 쓴 글이라고. 운명에 내던져진 사람들은 저마다 글을 남겼다.


그런 의미에서 사마천에게 역사란 지나간 과거의 인물들과 공명하는 읽기의 장이며, 동시에 잊힐지 모르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쓰기의 장이 된다. 사마천의 <사기>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개별 인간의 생생한 삶을 담아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사기열전>은 운명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었다. 그들은 저마다 어떤 울분 속에 격정을 토로하는 인물이었다. 사마천은 이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또 다른 삶, 운명과 권력에 포획되지 않는 다른 삶들을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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