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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24. 2020

어떻게 죽을 것인가

4강 장자와 사마천 #4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자유自由’는 분명 근대적 개념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로서의 자유. 그러나 그 이전, 오래전부터 이 말을 사용한 역사가 있다.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태도, 자기 고유의 삶을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는 표현이다. 제 삶을 온전히 실현하는 삶의 의연한 태도를 '자유'라고 이름 붙이자. 


사마천은 그 스스로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살고 있다 말했다. 실제로 그는 역사의 분기점을 살았다. 그의 시대는 새로운 '중국'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고, 황제 제도를 만들었다. 한漢은 그것을 계승했고, 한무제는 그것을 완성했다. 이렇게 통일된 세계에서 절대적인 권력이 탄생한다. 이렇게 탄생한 권력, 황제 제도는 '중국'의 변하지 않는 토대가 되었다. 


이 말은 그 권력의 주변에서 자유롭게 사유를 펼쳤던 시대가 저문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무제 이후 제자백가와 같은 활발한 사유가 펼쳐지지 못했다. 파출백가 독존유술, 다양한 철학적 시도는 사라지고 유가만이 국가 철학으로 군림한다. 이제 모든 철학은 유가 철학의 계통 안에서 해석되고 정립되는 시대가 열린다. 모두 체제 속의 삶을 살아야 하는 시대, 학술은 완벽하게 관학官學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사마천은 이 체제의 초입에서 갈등을 경험한 과도기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태사령이라는 직위에 올랐지만 치인治人, 통치의 기능을 하는 관료는 아니었다. 한漢의 신하로서 정체성을 갖고 있었지만 황제의 수족이 될 수는 없었다. 사마천은 권력 아래에서 저마다 희비를 겪은 인물들에 주목한다. 한때 재상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하루아침에 몰락한 인물로부터, 패왕 혹은 황제를 만든 모사들까지. 그러나 이들은 결코 역사의 주인공일 수 없었다.


그는 <본기本紀>를 통해 역사의 커다란 흐름을 보여준다. 총 12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왕조∙황제의 역사를 담고 있다. 순서는 이렇다. 오제 본기(五帝本紀) – 하 본기(夏本紀) – 은 본기(殷本紀) – 주 본기(周本紀) – 진 본기(秦本紀)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 – 항우 본기(項羽本紀) – 고조 본기(高祖本紀) – 여 태후 본기(呂太后本紀) – 효문 본기(孝文本紀) – 효경 본기(孝景本紀) – 효무 본기(孝武本紀)


총 12본기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항우와 여태후를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먼저 여태후를 보도록 하자. 그는 고조 유방의 부인으로 고조 사후에 실권을 잡았다. 황제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그는 여씨 성을 가진 자신의 친족들을 왕으로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동시에 여씨천하는 막을 내린다. 이 시기 세명의 황제 대신 여태후를 넣어 실제적인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한편 항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진시황이 죽고 막내 아들 호혜가 진시황을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한편 이곳저곳에서 반란군이 일어나 다시 한번 천하가 어지러워진다. 반란군은 초나라를 중심으로 뭉치고 의제를 옹립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 둘, 진나라의 이세황제 호혜도 아니고 초나라의 의제도 아닌 항우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다. 항우는 유방과 천하를 다투었던 인물이다. 한 때 그가 천하를 호령하였지만 무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느는 고작 '서초패왕'이라는 호칭을 얻었을 뿐이다. 제후諸侯와 제왕諸王의 이야기를 기록한 <세가>에 그를 기입하는 것이 적합하다. 


그러나 사마천은 <세가> 대신 <본기>에 그를 넣었다.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역사의 커다란 줄기에 한漢의 정적을 넣었다. 어떤 사람은 항우를 언급하여 그를 꺾은 유방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항우본기>와 <고조본기>를 읽어보면 그런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사마천이 항우의 일대기를 매우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반면 유바의 일대기는 비교적 간략하고 소박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우를 본기에 기술한 것은 사마천 개인의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단순한 기록자로 <항우본기>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역사 속에서 제 삶을 살았던, 찬란하게 빛나는 이들을 놓치지 않는다. 시대의 조류에 씻겨나가지 않는 삶에 주목하고자 했다. 운명에 부딪히며 저항하는 삶을, 꿈틀거리는 자유의 몸짓을 유려한 문체로 옮겨낸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고사가 나오는 부분을 살펴보자. 사방이 겹겹이 포위되었고, 도망갈 곳도 보이지 않는 절망스런 순간, 이 날 밤 항우의 이야기는 훗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적셨다. 


項王軍壁垓下,兵少食盡,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夜聞漢軍四面皆楚歌,項王乃大驚曰:「漢皆已得楚乎?是何楚人之多也!」項王則夜起,飲帳中。有美人名虞,常幸從;駿馬名騅,常騎之。於是項王乃悲歌慨,自為詩曰:「力拔山兮氣蓋世,時不利兮騅不逝。騅不逝兮可柰何,虞兮虞兮柰若何!」歌數闋,美人和之。項王泣數行下,左右皆泣,莫能仰視。

항우는 해하에 주둔하고 있었다. 군사는 줄어들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한나라와 제후의 병사들이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밤중에 한나라 병사들이 모두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불렀다. 이를 듣고 항우가 크게 놀랐다.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점령하였는가? 어찌 이렇게도 초나라 사람들이 많을까."

항우는 밤중에 일어나 막사 안에서 술을 마셨다. 우虞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었는데, 항우의 사랑을 받아 늘 함께 다녔다. 추騅라는 말이 있었는데 항우는 늘 이 말을 탔다. 이때 항왕(항우)가 비통한 마음으로 스스로  시를 지었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으나
때가 불리하니 추騅가 달리지 못하는구나.
추騅가 달리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할까.
우虞여! 우虞여! 너는 또 어떻게 헤야 할까."

노래가 여러 차례 멈추었는데 우虞가 함께 이어 노래를 불렀다. 항왕이 울어 몇 줄기 눈물이 흐르자 좌우의 인물들도 모두 눈물을 흘려 고개를 들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항우본기>


이어 항우는 남은 기병들을 이끌고 마지막 싸움에 나선다. 그는 여러 차례 포위망을 뚫고 자신을 증명해낸다. 그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싸움에서 진 것이 아니라 때가 불리하기 때문에, 하늘이 그를 망하게 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게 포위망을 뚫고 끝내 항우는 강나루에 이른다. 이제 배를 타고 강을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는 배를 타기를 거부한다. 강을 건너 도망가 후일을 도모하자는 말에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내 어찌 강을 건너가겠는가.(天之亡我 我何渡為)" 결국 그는 뱃사공에게 자신이 아끼던 말을 건네주고 말 아래에 내려 마지막 결전을 치른다. 수백 명의 병사를 베고 끝내 옛 부하에게 자신의 수급을 건네준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었다.


진실은 어떠했을까? 항우의 최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중요한 점은, 사마천이 그를 운명에 맞아 당당히 자신을 드러낸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그의 최후를 통해 운명에 대하는 태도를, 죽음을 맞는 태도를 논하고 있다.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을 맞을 수 없다는 그의 말을 기억하자. 사마천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문제로부터 거꾸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知死必勇 非死者難也 處死者難
죽음을 알게 되면 반드시 용맹스럽게 된다. 그것은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염파인상여열전>


항우의 죽음을 그려낸 데는 사마천 개인의 경험이 녹아있다. 사마천 역시 죽음을 마주하여 또 다른 선택을 한 인물이었다. 살기 위해 구차하게 선택한 것이라 생각하지 말자. 살기 위해 궁형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다른 죽음을 맞기 위해서였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 죽음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다른 삶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항우의 죽음에서 우리는 항우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볼 수 있다. 그는 죽음을 향해 스스로 걸어간 인물이었다. 한편 그렇지 않은 죽음, 사마천 자신이 억울하게 직면했던 그런 죽음은 피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삶도 죽음도 말해주지 않는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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