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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24. 2020

자유의 또 다른 길

4강 장자와 사마천 #5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흔히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 이야기한다. 설사 패자가 역사에 등장하더라도 조연으로 출연할 뿐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에서 여러 굴곡진 삶의 이야기를 실었다. 덕분에 우리는 <사기>를 통해 대문자 역사, 즉 일반적인 역사가 기술하지 못하는 여러 인생들을 만날 수 있다. 조금 더 과감하게 이야기한다면, 사마천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유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시대가 지워내는 삶들을 주목하여 그는 운명에 대응하는 삶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죽음에 대응하는 여러 삶들, <장자>에도 죽음이란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대종사>에 실린 내용을 참고하자. 여기서 장자는 죽음에 직면한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우선 맨 마지막에 실린 자여子輿와 자상子桑이라는 두 인물의 이야기이다.


자여와 자상은 친구였다. 장마가 열흘이나 계속되자 자여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자상이 굶으며 고생하고 있겠지.' 자여는 밥을 싸서 그에게 가져다주려 했다. 자상의 집에 이르자 자상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일까, 어머니일까. 하늘일까, 사람일까' 힘겹게 헐떡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 자여가 물었다.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노래하는가?' 자상이 답하였다. '이렇게 막다른 곳에 몰아넣은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지만 알 수 없네. 어찌 부모가 나를 가난하기 바라겠는가. 하늘과 땅은 만물에게 공평한데, 하늘과 땅이 나를 가난하게 했을까. 나를 가난하게 만든 게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해보지만 알 수가 없어. 그런데도 이런 상황에 내몰린다니 아마도 운명일 테지.'

<대종사>


자상은 고달픈 삶을 산다. 대체 무엇이 그의 삶을 그토록 고달프게 만들었을까? 따져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단다. 그래서 결국 명命, 운명 탓이라 생각할 뿐이다. 결국 운명을 발견하나 장자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는 운명을 발견하더라도 질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장자는 질문으로 가득 찬 책이다.


장자는 질문하는 철학자였다. 그의 질문은 우리를 어떤 한계 상황으로 내몬다. 쉬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쏟아지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질문을 던지고 답이 없다는 사실,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종사>에 실린 다른 우화를 보자. 위에서 소개된 자여가 주인공이다. 그가 죽을 상황이 되었다. 몸이 오그라들고 비틀어져버렸다. 친구인 자사子祀가 문명 차 찾아와 그에게 묻는다.


자사가 말했다. "자네는 그게 싫은가?" 자여가 답했다. "아니, 내가 어찌 싫다고 하겠나. 내 왼팔이 점차 변하여 닭이 되면, 나는 그것으로 새벽을 알릴 걸세. 내 오른팔이 변하여 활이 되면, 난 그것으로 새를 잡아 구워 먹을 생각이야. 내 엉덩이나 수레바퀴로 변하면, 마음은 말이 되어 그 수레를 끌어야지. 다른 마차가 필요하지 않겠지. 태어난다는 것은 그때를 만났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이치를 따름이지. 태어난 때를 편안히 맞고 이치를 따르면, 슬픔이니 즐거움이니 하는 것이 일어날 수 없겠지. 이것이 옛날 사람들이 말하던 '묶임에서 풀려남'이라 하겠네."


자여는 자신이 어떤 변화 속에 있다고 말한다. 크게 보면 죽음도 하나의 변화이다. 문제는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여는 온몸으로 그 변화를 받아들일 것이라 말한다. 그의 말은 하나의 유쾌한 비유이다. 몸이 마구 비틀어져서 왼손이 닭이 되면? 그땐 그때의 일이 있다. 또 다른 상태로 변하면 그때에 맞는 일을 하면 될 뿐이다. 이것을 '현해縣解', 묶임에서 풀려남이라 말하였다. 죽음이 하나의 변화임을 인지할 때, 그 변화 속에서 다른 길을 찾을 때 그는 더 이상 묶은 존재가 아니다. 이 삶을 자유롭다 말할 수 있으리라.


또 다른 친구, 자래子來의 이야기를 보자. 자래의 상태는 더 심각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고 있을 때 친구 자리子犁는 괴이한 질문을 던진다.


자래가 병에 걸렸다. 헐떡이며 곧 죽을 것 같았다. 아내와 자식들이 그를 둘러싸고 울고 있었다. 자리가 그를 찾아가 말했다. '썩 자리를 피하시오. 죽는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마시오.' 자리가 문가에 기대어 자래에게 물었다. '조화造化의 능력은 훌륭하구나. 너를 또 무엇으로 만들며 어디로 데려갈까? 쥐의 간이 될까? 아니면 벌레의 다리가 될까?'


생명 개체의 생사는 커다란 우주적 조화의 일부분이다. 자려는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다 말하지 않는다. 영혼이나 귀신 따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윤회와도 같은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뚱이는 죽으면 썩고 흩어질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무엇의 일부가 된다. 과연 무엇이 될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거대한 조화의 흐름에 내던져 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각각의 육신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나'라는 개별적 존재, 고유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장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우리를 이루는 것들을 이전에 다른 것의 '일부들'에 불과하다. 장자는 모든 존재를 그렇게 흐릿하게 기술한다. 조화라는 거대한 흐름의 일부를 절취하여 일시적으로 '나'라고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다.


장자는 우리의 삶을 하나의 커다란 꿈이 아닌가 질문하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는 깨어나지 못하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줄 어찌 알겠으며, 그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꿈에서 깨어야 꿈인 줄 알 수 있을 뿐이니 말이다. 장자의 질문은 집요하다. 꿈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꿈이라면 어떻게 되나. 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망량罔兩(옅은 그림자)이 그림자에게 물었다. '아까는 걷더니 지금은 멈춰있고, 아까는 앉아 있더니 지금은 또 서있소. 어째서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요?' 그림자가 답했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겠소? 그런데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 역시 또 의지하고 있는 것을 따라 그렇게 움직이겠지요. 그러나 나는 뱀의 껍데기나 매미의 날개와도 같은 것에 의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어째서 그런지 알겠으며, 또 어째서 그렇지 않은지 않겠소?"


옅은 그림자는 그림자를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는 그림자에 묶인 존재이다. 그래서 따져 묻는다. 왜 자꾸 이랬다 저랬다 움직이느냐고. 그러나 그림자도 항변할 말이 있다. 그림자는 누군가의 몸뚱이 묶여 있다. 그렇다면 그 몸뚱이를 거슬러 올라가 따져 물으면 될까? 그러나 그 몸뚱이 조차도 다른 무엇인가에 묶여 있다면?! '어찌 그런지 알겠으며, 또 어찌 그렇지 않은지 알겠소? (惡識所以然 惡識所以不然)’


그러나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도 질문은 여전히 쓸모가 있다. 질문하는 만큼 그 존재는 자유롭게 되었을 테니까. 장자에게 절대적인 자유는 없다. 그 묶인 근본을 풀 수 없다. 묶임에서 풀려나지 않더라도 자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장자는 선명한 대답이 갖는 단편적인 진리에 주목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집요한 질문을 통해 세계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사마천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문제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들을 기술했다. 그러나 장자는 죽음을 통해 존재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이 모호함이야 말로 장자의 자유가 놓인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엇. 그것을 틈이라고 하자. 그것을 여유라고 해도 좋다. 사마천이 운명에 맞서 드러나는 개개인의 개별적 삶에 주목했다면, 장자는 끊임없는 변화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도 저도 아닌 무엇. 거기에 속박에서 풀려나는 길이 있다 말한다.


길(道)이란 그렇게 각자가 삶 속에서 경험하고 체득하며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길이란 다녀서 만들어지는 것이다(道行之而成)'라고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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