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루쉰읽기

멀고도 아득하여라

청년학당 3학기 - 루쉰, 길이 끝난 그곳에서 외치다 6강

by 기픈옹달

<외침>에 실린 몇몇 글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에 가깝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신제 연극>의 경우에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가서 지내던 일을 기억하고 썼다. <토끼와 고양이>, <오리의 희극> 역시 실제 경험한 일이다. <흰 빛>은 그의 친척 가운데 하나의 죽음을 참고하여 쓴 것이고, <단오절>은 당시에 그가 겪은 비슷한 체험 위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루쉰은 그렇게 빼어난 이야기꾼은 아닌 게 분명하다.


<지신제연극>에서 보이는 그 어린 시절의 아득한 이야기는 이후 <아침 꽃 저녁에 줍다>에서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루쉰이라는 한 인간을, 그의 성장배경에서부터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글이다. 우리는 <들풀> 이후에 <아침 꽃 저녁에 줍다>를 읽을 예정이다.


멀고 아득한 어린 시절은 누구에게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유년의 기억이란 그 자체로 무언가 그리움은 물론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면이 있다. 그러나 루쉰의 고약한 성미는 그저 옛 일을 추억함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토끼와 고양이>의 경우 귀여운 토끼와 날카로운 고양이 사이에 비뚤어진 그의 심보(!)를 만날 수 있다.


조물주에게 비난받을 점이 있다면, 그건 너무 함부로 생명을 만들고 너무 함부로 훼멸한다는 점이다.

고양이에게 사라진 토끼는 물론, 그의 말대로 세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이 태어나고 많이 죽는 게 자연의 또 다른 얼굴이다. 여기서 끝나면 그저 아쉬움을 서술한 글이 될 테다. 그런데 그는 글의 꼬리를 길게 늘여 놓았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죽이기도 했던 자신의 이야기로 끝맺는 것이다.


조물주는 너무 엉터리다. 나는 그에게 반항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저 검은 고양이가 언제까지 담장 위를 거만하게 활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나도 모르게 책상 속에 감추어둔 청산가리 병으로 눈길이 갔다.


<토끼와 고양이>는 이렇게 끝난다. 대체 청산가리병으로 무엇을 하려 했기에! 아마 몰래 고양이를 죽일 요량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보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죽음 가운데 루쉰네 담장 위를 돌아다녔던 고양이의 죽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루쉰이 말한 ‘서글픔’에 동조할 수가 없다. 과연 그는 무엇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글에 번뜩이는 이런 광기는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그의 이런 단순하지 않은 태도는 <오리의 희극>에서도 보인다. 러시아의 맹인 시인 예로센코는 베이징에 와서 이렇게 토로한다.


“적막하다, 적막해. 사막에 있는 듯 적막하도다!”


그는 미얀마에서 겪었던 음악과도 같은 그 풍성함을 그리워한다. 벌레들의 울음소리, 이따금 뱀 울음도 들리는 그곳. 그는 개구리의 울음조차 들리지 않는다며 푸념한다. 그러나 루쉰은 베이징에 도랑이 천지니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말한다. 예로센코는 개구리울음 소리를 기대하며 올챙이를 사 왔다. 연못을 꾸미고 올챙이가 개구리로 변하기를 기다리려고. 그는 이것저것 많은 것을 사 오곤 했는데 그중에는 새끼 오리도 있었다. 오리는 연못에 몸을 담갔고 연못의 올챙이를 잡아먹어 버렸다!! 그리고 결국 그는 개구리울음 소리를 듣기도 전에 고국으로 떠나버렸다.


여름 비가 내리고 개구리울음 소리가 어지럽게 울리는 가운데 새끼 오리는 꽥꽥 소리를 내며 울 정도가 되었다. 장마철 물바다가 된 뜰 안을 오리들은 신나서 꽥꽥 울며 돌아다녔다. 다시 가을이 되어 적막을 맞아야 할 때가 되었다. 예로센코 군은 소식도 없다. 오직 ‘오리 네 마리만이 사막 위에서 ‘꽥꽥’ 울어 대고’ 있을 뿐이다.


결국 적막이란 고요함과는 다른 것임을 깨닫는다. 이전보다 시끄러운 집이 되었지만, 오리 네 머리가 울어대는 시끄러운 와중에도 적막감은 가시지 않는다. 적막이란 무엇이 있지 않아서 느껴지는 게 아닐까. 상실이 있어야 적막도 함께 찾아오는 것이 아닐지.


<흰 빛>은 개인적으로 주목해서 보는 작품이다. <광인일기>, <아Q정전> 등에서 보았던 어떤 광기, 기괴함이 그 속에 담겨 있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과거에 낙방한 천스청은 집안 어딘가 어마어마한 은자를 숨겨 두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낸다. 그는 낙방하면 발작이 도져 은자를 찾기 위해 집안 곳곳을 뒤지곤 했다. 이번 낙방에도 그 발작이 도져버려 그는 은자를 찾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러나 발작을 만들어내는 기묘한 소리는 이번에 더 크게 울려 그를 산으로 끌고 각고, 결국 이튿날 그는 먼 곳에서 떠내려온 시체로 발견된다.


그가 본 흰 빛은 무엇이었을까? 루쉰은 그의 눈에서, 흰 달에서 그리고 어딘가 숨겨져 있는 은자에서 그리고 누군가 히죽거리며 말을 거는 누군가에서 그 빛이 보인다 말한다.


피곤으로 충혈된 두 눈에선 야릇한 광체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벽에 붙은 방문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지는 제법 되었다. 새까만 동그라미들이 무수히 눈앞을 떠다닐 뿐이었다.

그는 또 다시 주저 앉았다. 눈빛이 유난이 번쩍거렸다. 눈엔 무수한 것들이 보였지만 희미했다. 무너져 내린 전도가 그 앞에 드러누어 있었다. 이 길이 점점 넓어지더니 그의 모든 길을 막아 버렸다.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렀다. 뜬구름은 누군가가 물에 붓을 씻어 낸 듯 하늘거렸다. 달은 천스청을 향해 냉랭한 빛을 쏟아붓고 있었다. 처음엔 방금 닦아 낸 쇠거울 같았는데, 신기하게 천스청의 전신을 투사하더니 이내 무쇠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오늘은 쇠 같은 빛이 그를 뒤덮으며 또다시 그를 나긋이 이끄는 거였다. 혹시 그가 주저할세라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준 뒤 슬쩍 추임새를 넣음으로써 시선을 자기 집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흰 빛이 마치 흰 부채처럼 일렁이며 그의 집 안을 번쩍이고 있었다.


그가 말한 흰 빛(白光)이 무엇인지를 세세하게 분석할 여력이 현재 나에게는 없다. 흰 빛, 허망한 빛을 좇아다니다가 결국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은 <쿵이지>에서 나왔던 그런 낡은 지식인을 표상한 것일까. 낡은 과거 시험에 얽매여 끊임없이 낙방하는 건 물론, 자기 가계에 전해져 내려 온다는 전설에 발작을 일으키는 것까지.


그런데 달 빛이 쇠 같은 그림자를 낳고 거꾸로 쇠 같은 빛이 그를 뒤덮으며 이끈다는 말이 기묘하게 보인다. 그림자는 나 자신인 동시에 자신이 아닌 무엇이다. 거꾸로 그 은전을 상상하게 한 흰 빛도 그의 눈에 있던 야릇한 광체와 같지만 다른 무엇이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산속을 헤매다 죽은 그의 모습은 어쩌면 루쉰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 아니었을지. 그야말로 흰 빛을 좇아 그렇게 헤매던 자가 아니었을지. 그의 글은 그 분투의 흔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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