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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Dec 05. 2020

밤이 좋다

문장 채집 - 정지용 <향수>

http://aladin.kr/p/pJLav


"밤에 조용히 있으면 시계가 가는 소리가 들려요, 엄청 크게."


요즘에도 시계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내 주변에 있는 것은 모두 소리 없는 시계들이다. 노트북, 핸드폰 등등. 똑딱똑딱 움직이는 시계 소리를 들어본 지 꽤 오래되었다. 우연일까. 아이가 학교에서 만들어온 공작품에 시계를 달아 놓았다. 시계탑 모양의 작품보다 인상적인 것은 규칙적으로 울리는 시계의 발자국 소리다.


한 밤에 벽시계는 불길한 탁목조
나의 뇌수를 미싱 바늘처럼 쫓다.

일어나 쫑알거리는 '시간'을 비틀어 죽이다.
잔인한 손아귀에 감기는 가냘픈 모가지여!

<시계를 죽임>


정지용의 시집 <향수>를 청소년과 읽으며 고민이 많았다. 이 시를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닳도록 외운 시이지만 오늘날 청소년에게 과연 고향을 노래한 시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저마다 감상을 이야기하니 시간이 술술 간다. 역시나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시의 매력을 발견한다니 반갑다. 한 친구는 <유리창>을 꼽았다. 소리 내어 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니 시에서 이야기하는 감상이 새롭다. 이른바 기출지문으로 얼마나 많이 보았던 시인가. 그러나 가만히 소리 내어 읽어보니 시 고유의 아름다움이 물씬 풍긴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유리창 1>


아무래도 교과서에서 만난 게 잘못이었나 보다. 정지용에 대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모두 딱딱하고 따분한 것들이다. 의무감으로 이 시집을 선택했지만 이렇게라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그의 시에서 만나는 밤이 반가웠고, 그 역시 숱한 시간을 잠 못 이루며 지내는 고독한 인간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한다.


요즘 들어 밤낮이 바뀌었다. 밤에 글도 쓰고,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 적막한 시간을 지내다 보면 서울 한복판, 천만 도시 속에 울리는 다양한 소리를 듣는다. 찻길을 지나는 차들, 때로는 굉음을 울리며 무섭게 달려가는 스포츠카, 오토바이. 골목길을 지나가는 어느 사람의 노랫소리.


한참 시간을 지나다 보면 이 삭막한 도시 가운데서도 새소리를 만날 수 있다. 새벽을 알리고, 아침을 예고하는 소리인 셈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에게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제는 자야지. 더 깨어있지 말고. 


그래서일까. 아침이 싫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게 싫다.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고, 남들보다 늦게 마무리하는 하루여서 어디부터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 모호하니, 시간이 술렁술렁 흘러가는 기분이다.


그렇게 뻔하디 뻔하게 하루를 끝내기 싫고, 평범하게 기계적으로 내일을 맞이하기 싫어 밤이면 마음을 서성이고 있다. 습관처럼. 



밤이면 으레 홀로 돌아오는
붉은 술도 부르지 않는 적막한 습관이여!

<귀로>


그의 시 가운데는 '불사조'가 가장 좋았다. 비애, 슬픔이란 그렇게 스스로를 불태우고 다시 그 잿더미 가운데 다시 활활 타오르는 것이지. 스스로를 먹고 스스로 크는 불멸의 감정. 그러니 어디서부터 이놈을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지독히 타올라 스스로 소멸하지 않기를, 찬란하게 다시 태어날 테니. 적당히 그작그작 적당히 슬픔을 머금고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수밖에.



비애! 너는 모양할 수도 없도다.
너는 나의 가장 안에서 살었도다.

너는 박힌 화살. 날지 않는 새,
나는 너의 슬픈 울음과 아픈 몸짓을 지니노라.

너를 돌려보낼 아무 이웃도 찾지 못하였노라.
은밀히 이르노니 — '행복'이 너를 아주 싫어하더라.

너는 짐짓 나의 심장을 차지하였더뇨?
비애! 오오 나의 신부! 너를 위하야 나의 창과 웃음을 닫었노라.

이제 나의 청춘이 다한 어느 날 너는 죽었도다.
그러나 너를 묻은 아무 석문도 보지 못하였노라.

스스로 불탄 자리에서 나래를 펴는
오오 비애! 너의 불사조 나의 눈물이여!

<불사조>

    


* 함께 책을 친구들과 매주 글쓰기 결과물을 남기기로 했다. 생각나는 대로 짧은 흔적을 남겨둔다. 다음에는 김유정의 소설들을 읽는다.

https://zziraci.com/uphum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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