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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Mar 13. 2021

장자익 : 소요유 2

번역해보자

【郭注】

곤과 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장자는 자유롭게 노닐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만족하는 삶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고 지극히 큰 것으로 본성의 분수性分에 어울리는 삶을 이야기했다. 도에 통달하고자 하는 선비는 비유에 주목하지 말고 핵심을 살펴야만 한다. 곤이 붕이 되는 것은 아득한 바다가 몸을 놀리기에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구만리가 그 날개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는 것도 아니다. 어찌 이처럼 기이한 것에 주목한단 말인가! 단지 커다란 사물은 반드시 커다란 곳에서 살아가며, 커다란 곳은 이런 커다란 사물을 낳을 뿐이다. 이치가 그렇다.
 
날개가 크면 날아오르기 힘들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을 타고나서야 구만리를 올라갈 수 있다. 한번 올라가면 반년을 날아 하늘의 못(天池)에 이르러 쉰다. 야마野馬는 공기가 움직이는 것이다. 야마진애野馬塵埃는 모두 붕이 올라타 날아가게 하는 것이다. 하늘이 푸르고 푸르나 하늘의 본디 색깔인지 아니면 하늘이 멀어서 닿을 수 없어 그런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붕이 위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것이나 사람이 땅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나 같으니, 날아오르는 것을 멈추고 남쪽으로 날아간다. 붕이 도리의 멀고 가까움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뽐내는 것을 만족하며 떠난다는 뜻이다. 

鯤鵬之實。吾所未詳也。夫莊子之大意。在乎逍遥遊放。無為而自得。故極小大之致。以明性分之適。達觀之士。宜要其會歸。而遺其所寄也。鯤之化鵬。非冥海不足以運其身。非九萬里不足以負其翼。此豈好竒哉。直以大物必生於大處。大處必生此大物。理固然者。翼大則難舉。故搏扶揺而後能上九萬里。一去半歲。至天池而息也。野馬者遊氣也。野馬塵埃。皆鵬之所慿以飛者。夫天之蒼蒼。竟未知便是天之正色邪。天之為逺而無極邪。鵬之自上以視地。亦猶人之自地觀天。則止而圖南矣。言鵬不知道里之逺近。趣足以自勝而逝也。

* 會歸 1.《书·洪范》:“会其有极,归其有极。”谓君王聚合诸侯臣民,有其准则;诸侯臣民归顺君王,亦有其准则。后以“会归”为共同依归的极则。 2.会合;归结。 3.结局,结果。


물이 충분히 많지 않으면 커다란 배를 띄울 수 없어. 바닥에 움푹 파인 곳에 잔을 엎질러도 티끌로 배를 띄울 수 있지. 그렇지만 잔을 띄우면 바닥에 닿아버려. 얕은 물에 큰 것을 띄우기 때문이야. 바람이 충분하지 않으면 커다란 날개를 띄울 수 없어. 그러니까 구만리를 올라간다는 것도 그만큼 바람이 아래에 있다는 거야. 그래야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어.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면 거칠 것이 없지. 그렇게 남쪽으로 날아가는 거야. 


매미와 메추리는 붕을 보고 비웃는단다. "우리는 바짝 힘을 내어 날아가면 나무에 부딪히는 게 고작이야. 그러다 나무에 닿지 못하고 땅에 처박히는 일도 있어. 그런데 뭔 구만리를 올라가 남쪽으로 날아가고 그런담."


들로 소풍을 떠나는 사람은 세 끼를 먹고 돌아와도 여전히 배가 부르지. 백리 길을 떠나는 사람은 밤새워 곡식을 찧어야 해. 천리 길을 가는 사람은 어떨까. 석 달간 양식을 모아야 하지. 저 매미나 메추리가 무엇을 알까. 작은 앎은 커다란 앎에 미치지 못하고, 작은 삶은 커다란 삶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야.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고? 아침에 피는 버섯은 그믐달을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 수 없어. 작은 삶이란 이런 거나 마찬가지야. 초나라 남쪽에 명령㝠靈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봄으로 다시 오백 년을 가을로 산다고 해. 저 먼 옛날에는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데. 팔천 년을 봄으로 팔천 년을 가을로 살았다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팽조가 오래 살았다고 떠들어 대면서 그만큼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니 애닯지 않겠냐고. 


且夫水之積也不厚。則負大舟也無力。覆杯水於坳堂之上。則芥為之舟。置杯焉則膠。水淺而舟大也。風之積也不厚。則其負大翼也無力。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而後乃今培風。背負青天。而莫之夭閼者。而後乃今將圖南。蜩與鷽鳩笑之曰。我決起而飛搶榆枋。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奚以之九萬里而南為。適莽蒼者。三飡而反。腹猶果然。適百里者。宿舂糧。適千里者。三月聚糧。之二蟲又何知。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奚以知其然也。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此小年也。楚之南有㝠靈者。以五百歲為春。五百歲為秋。上古有大椿者。以八千歲為春。八千歲為秋。而彭祖乃今以久特聞。衆人匹之不亦悲乎。

* 垤(요) : 움푹 파인 것

* 閼(알) : 닿다


최선 : "바닥에 길처럼 패인 것을 요坳라고 한다."
지둔 : "움푹 파여 작은 둑을 이룬 모양을 말한다."
膠 : 땅에 닿음
蜩 : 사마표 "매미(蟬)이다."
鷽鳩 : 작은 새
决 : 재빠른 모양
搶 : 부딪히다.
榆枋 : 모두 나무의 이름이다.
莽蒼 : 근교의 색이다. 
果 : 배부른 모습
朝菌 : 큰 버섯, 날씨가 흐리면 거름 위에서 생겨났다 햇볕을 보면 사라진다. 
양용수楊用修 : "조균朝菌은 옛 판본에 계균雞菌이라 되어있다. 지금 전滇 지역에서 버섯을 일컬어 계종雞堫이라 하는데 이것이다.
蟪蛄 : 쓰르라미(寒蟬). 봄에 태어나 여름에 죽거나 여름에 태어나 가을에 죽는다.
彭祖 : 성은 전(籛), 이름은 갱(鏗). 요임금이 팽성에 봉하였다. 상나라까지 700살을 살았다. 

崔云。堂道謂之坳。支遁云。謂有坳垤形也。膠著地也。蜩司馬云蟬。鷽鳩小鳩也。决疾貌。搶突也。榆枋皆木名。控投也。莽蒼近郊之色也。果飽貌。朝菌大芝。天陰生糞上。見日則死。楊用修云。朝菌古本作雞菌。今滇中名菌曰雞堫是也。蟪蛄寒蟬也。春生夏死夏生秋死。彭祖姓籛。名鏗。堯封於彭城。至商年七百歲。


【郭注】
붕이 높이 나는 것은 날개가 크기 때문일 뿐이다. 자질이 작은 자는 큰 것에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 자질이 큰 자는 쓰는 것이 작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치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고, 사물에는 정해진 한계가 있다. 각기 어울리는 일에 만족하면 모든 일이 원만하다. 만약 삶을 망각하고 사는 삶에서 벗어나고, 지극히 당연함과 동떨어져 삶을 영위한다면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고,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늘에 날개를 드리울 정도로 커다란 존재라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애써 힘을 내어 날아가면 힘들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높은 곳을 좋아하여 멀리 날아가고자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바람이 충분하지 않으면 얽매이는 것이 있어 오가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세 끼를 이야기한 세 구절은 가야 할 곳이 멀 수록 모아야 하는 양식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날개가 클수록 더 많은 바람이 필요하다. 이충二蟲은 붕과 매미를 말한다. 큰 것을 작은 것에 견주어 다른 생각의 같음을 이야기하였다. 생각이 다른 것이 어찌 앎이 달라 다른 것이겠는가! 모두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자연스레 그럴 뿐이다. 이것이 소요유 편의 핵심이다.

수명과 지식은 이처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에 견주면 슬퍼할만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슬퍼하지 않았던 것은 각기 본성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알면 조금도 서로 애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천하에 어찌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 커다란 것은 작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꼭 작은 것이 커다란 것을 선망한다. 그러므로 작은 것과 커다란 것의 차이를 예로 들었다. 각기 정해진 분수가 있으니 선망하여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알면 선망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슬픔이란 이 사슬에서 생겨난다. 이 사슬을 끊으면 슬픔이 사라진다. 슬픔이 사라지고 삶이 편안치 않은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부터 열자에 이르기까지 수명과 지식의 크고 작음을 나열하여 예로 들었다. 저마다 자기 입장을 지키면 서로 경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후에야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저것을 내버려 두고 나를 잊으면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 입장은 다르나 깨닫는 것은 같으니 나에게 공적이나 명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큰 것을 아우르는 것이 작고 큰 구분을 없애는 것이다. 작고 큰 구분이 있다면 비록 커다란 붕과 메추리, 관직 생활과 바람을 타고 날으는 것 모두가 사슬에 얽매여 있는 것일 뿐이다. 삶과 죽음을 같다고 여기면 삶과 죽음의 구분이 사라진다. 삶과 죽음의 구분이 있으면 대춘大椿과 매미, 팽조와 조균朝菌모두 제 수명을 살지 못하고 일찍 죽어버리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작고 큼의 구분을 없애고 노니는 자,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잊은 자는 한계가 없이 무궁한 삶을 사는 자이다. 만약 소요逍遥, 편안히 거닌다 하면서 한쪽에 메여 있는 자는 비록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여도 한계가 있을 것이니 자취 없이 다닐 수 없다. 

鵬之所以髙飛者。翼大故耳。夫質小者所資不待大。則質大者所用不得小矣。故理有至分。物有定極。各足稱事。其濟一也。若乃失乎忘生之主。而營生於至當之外。事不任力。動不稱情。則雖垂天之翼。不能無窮。决起之飛。不能無困矣。夫所以乃今將圖南者。非其好髙而慕逺也。風不積則夭閼不通故耳。三飡三句。所適彌逺。則聚糧彌多。故其翼彌大。則積氣彌厚也。二蟲謂鵬蜩也。對大於小。所以均異趣也。夫趣之所以異。豈知異而異哉。皆不知所以然而自然耳。此逍遥之大意。夫年知不相及。若此之懸也。比之衆人之所悲。亦可悲矣。而衆人未嘗悲此者。以其性各有極也。茍知其極。則毫分不可相跂。天下又何所悲乎哉。夫物未嘗以大欲小。而必以小羡大。故舉小大之殊。各有定分。非羡欲所及。則羡欲之累可以絶矣。夫悲生於累。累絶則悲去。悲去而性命不安者。未之有也。自此已下至於列子。歷舉年知之大小。各信其一方。未有足以相傾者。然後統以無待之人。遺彼忘我。冥此羣異。異方同得。而我無功名。是故統小大者。無小無大者也。茍有乎小大。則雖大鵬之與斥鷃。宰官之與御風。同為累物耳。齊死生者。無死無生者也。茍有乎死生。則雖大椿之與蟪蛄。彭祖之與朝菌。均於短折耳。故遊於無小無大者。無窮者也。冥乎不死不生者。無極者也。若夫逍遥而繫於有方。則雖放之使遊。而有所窮矣。未能無行也。

* 忘生之主 : 일부에서는 忘生之生으로 되어 있다. 이를 참고하여 옮겼다. 
* 懸(현) : 현격하다, 멀다. 
* 毫分(호분) : 매우 작음




장자강독(https://zziraci.com/lecture/duzhuangzi) 을 준비하면서 <장자익> 본문과 주석, 곽상주를 번역중이다. 역시나 질문은 댓글로.

이를 <장자익> 번역이라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책을 엮은 초횡의 관점에 따라 장자 본문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내 풀이 대로 장자 본문을 번역하기 때문이다. 일단 장자익 구성을 참고하고 주석까지 옮기고 있으니 <장자익> 번역이라 퉁치자.

<장자>는 이야기 책이다. 그래서 우화를 들려주듯 구어체로 옮기려 했다. 차차 여러번 읽어보면서 세세하게 표현을 고치도록 하자.

곽상은 큰 것은 큰 것의 세계가 있고 작은 것은 작은 것의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이다. 크고자 하다보면 무리하고 다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읽는 것이, 네 타고난 꼬라지에 만족하고 살라는 것이 장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그런 구분을 파괴하고 새로운 커다란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드문드문 곽상을 주를 볼 때도 그랬지만 영 달갑지 않은 해석이다.

<장자익>의 곽상주는 초횡이 나름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중간에 삭제된 부분도 있는데 대략적인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장자 본문을 옮기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데, 역시 곽상주를 옮기는 것이 힘들다. 일단 시작했으니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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