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야자득야 - 덕후의 득템 라이프
영화 <미나리>를 보고 온 후 남기는 개인적인 글.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은 나중에.. ^^;;
가끔은 영화를 보는 게 좋다. 머리를 식히기에도 좋고, 세상을 좀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뉴스만 보아서는 세상이 전쟁터 같다. 정치로 싸우고, 질병과 싸우고. 싸움 구경이 재미있어 자꾸 보게 된다. 그러나 문득 내 삶과 딱히 관련이 없다는 생각에 재미가 있어도 좀 멀리 해야지 마음먹는다.
교양을 쌓으러 영화관에 다녀왔다. 유명하니 나도 한번 보자는 마음에 시간을 내었다. 먼 이국 땅의 이야기, 영화관에 앉으니 부부로 보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캐나다 이민 간 사람이 말하던데, 이거 완전 다큐래' 그래? 이민자의 이야기라니 한 번 들어보자.
앞서 영화를 보고 온 지인은 별로 공감할 수 없었다고 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겠다 싶었다.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러 간 이민자 이야기에 우리가 무얼 공감하겠는가. 그러나 거꾸로 나는 영 다른 경험을 하고 말았다. 옛날 유년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기억을 붙잡고 몇 글자 적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내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버지는 양화점을 했다고 하는데 아무 기억이 없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일 테다. 기억에 남아 있는 첫 장면은 불판에 남은 고기 부스러기와, 잔 바닥에 남은 콜라를 마시는 일이었다. 고깃집 아들이 즐길 수 있는 나름의 소소한 재미였다. 양화점이나 고깃집 보단 양계장이 더 기억에 남는다. 네댓 살 되던 해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근교 시골로 이주했다. 양계장을 하면 한몫을 크게 벌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영화 <미나리>에서 제이콥은 병아리 감별사다. 캘리포니아에서 일하다 염증을 느낀 그는 가족과 함께 아칸소로 이주한다. 가든, 아니 농장을 가져보겠다는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 대도시에 살던 이들이 마주하는 아칸소 시골의 삶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이웃이 보이지 않는 외딴집에, 비가 새고, 전기가 끊기고 등등. 그러나 막내 데이빗은 즐겁다. 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한 나 역시 천진난만하게 시골 생활을 즐겼다. 무엇보다 시골의 삶은 단조롭지 않았다. 산과 들로 놀러 다닐 수 있었고, 풀과 나무가 매일 모습을 바꿔 자랐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커다란 농장을 갖는 것이었다. 갖가지 동물이 가득 찬.
다만 냄새는 좀 견디기 힘들었다. 시골의 공기는 도시의 것과는 영 다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면 땅이 숨을 내뿜듯, 흙냄새가 가득하다. 풀냄새가 뒤섞인 습하고 낯선 냄새. 영화에서 외딴 시골에 던져진 가족이 만난 새로운 환경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나의 경우 우리 집은 양계장을 했기 때문에 늘 닭똥냄새가 가득했다. 삐약삐약 울어대는 병아리들의 시끄러운 소리며, 그 털에서 나는 냄새까지. 남들은 병아리가 귀엽다고 하는데, 나는 결코 병아리 - 닭과 친해지지 못했다.
영화는 굴뚝의 연기를 통해 수평아리들 '폐기'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 부화장을 따라다녀보았지만 한 번도 병아리 감별사를 만나지 못했다. 부화장은 의외로 단순한 곳이었다. 커다란 부화기에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를 정신없이 종이 박스에 담아 양계장으로 보내는 곳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비극은 눈에 보이는 장애로 인해 일어나곤 했다. 수천수만 마리 병아리를 옮기다 보면 갖가지 기형을 만난다. 이들은 '폐기' 당하지도 못하고 바로 먹잇감이 되곤 했다. 그래서 부화장 구석에는 살찐 개가 있었고, 양계장을 하는 우리 집에도 살찐 개가 여럿 있었다.
병아리를 실어오면 한 마리씩 잡아두고 물을 먹여주곤 했다. 태어나자마자 장거리 여행을 해서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바카스를 물에 타서 조금 먹여주기도 했다. 연약한 병아리는 쉬이 목숨을 잃곤 했다. 영화는 병아리처럼 연약한 한 인물을 보여준다. 바로 데이빗의 심장이 문제다. 뒤의 의사 이야기를 참고하면 심장에 구멍이 난, 선천적 심장 질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데이빗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이것이다. '데이빗 뛰지마'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도시로 나가 몇 번 차가운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초음파 검사도 하고, 심전도 검사도 했다. 나 역시 선천적 심장 질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빗 보다는 좀 나은 상황이었을까? 뛰지 말라는 이야기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들처럼 빠르게 뛰지 못했다. 운동회 때, 아무리 달려도 친구의 발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 데이빗의 심장에 난 구멍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데이빗처럼 성장과 함께 구멍이 매워지는 경우도 있다. 데이빗은 운이 좋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국민학교에 입학한 해 여름, 나는 수술대에 올랐다.
영화에서 병아리는 가족의 연약한 삶을 상징한다. 아버지 제이콥은 아들 데이빗에게 수평아리들처럼 '폐기'되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고. 그러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은 정말 어렵다. 말 그대로 맨땅에 삽질하는 일이다. 비옥한 땅이면 고생이 덜할까?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도 물길을 찾지 못하면 꽝이다. 영화는 그 땅의 전 주인이 실패하고 자살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비옥한 땅의 물 찾기, 이 역설적인 표현이 이 영화를 꿰뚫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우물을 찾는 것은 힘들지만, 다행히 늘 물이 흐르는 개울이 근처에 있다. 조금 떨어져 있지만 아주 먼 곳은 아니다. 한국에서 넘어온 할머니 순자는 이곳에 미나리 씨앗을 뿌릴 생각이다. 미나리는 어디서나 대충 자라니까. 이 개울은 할머니와 손자의 산책 공간이며, 둘 간의 추억을 쌓는 소중한 장소이다. 한편 뱀이 종종 나타나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봄이면, 나는 어머니와 함께 미나리를 캐러 돌아다니곤 했다. 그래도 나는 봄나물 가운데 냉이가 가장 좋았다. 냉이는 꽃을 피우기 전, 바닥에 찰싹 붙어 자란 녀석이 좋았다. 작은 녀석이 얼마나 힘이 좋은지, 쪼그려 앉아 냉이를 캐는 일은 나름 수고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미나리는 한결 쉬웠다. 과연 캔다는 말이 맞을지. 냉이를 캐려면 호미를 챙겨야 했지만, 미나리는 작은 칼 한 자루면 충분했다. 밑둥을 쓱 베면 되었다. 베어진 자리에서도 미나리는 다시 쑥쑥 잘도 자랐다.
미나리는 물가에서 자란다. 그래서 미나리를 캐러 가는 길에는 뱀을 만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어머니와 미나리를 캐러 나갔다가 뱀을 만나 돌아온 기억도 있다. 억척스런 시골 생활에서도 뱀은 늘 무서운 존재였다. 뱀도 종류마다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독이 있는지 없는지, 구렁이인지 살모사인지 따위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만나면 빨리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영화에서 할머니는 뱀을 보고 돌을 던지려는 데이빗을 만류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더 위험한 것이라면서. 사실 그렇다. 가장 치명적이고 뼈아픈 사고는 예측하지 못한 데서 찾아오니까. 보기 싫더라도 차라리 눈에 보이는 문제가 낫다.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데이빗의 심장이 끊임없이 데이빗 가족을 불안하게 했던 것처럼.
미나리가 모여 자라는 공간. 그곳을 미나리광이라 불렀다. 도로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시골 풍경이 하나둘 변하면서 그 미나리광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지금도 미나리가 자라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물풀들에 밀려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다. 아니, 물이 끊어져 마른땅이 되었거나, 주변이 개발되면서 시멘트로 덮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에서 제이콥은 큰 빚을 지면서 작물을 키운다. 그렇게 키운 작물을 팔 곳을 찾아야 하는데 적당한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방법을 찾아야 한다. 판로를 찾지 못하면 썩고 문드러질 테니. 운 좋게 판로를 찾은 날, 긴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가족이 마주한 것은 커다란 불길이었다. 농작물을 보관하던 창고에 불이 붙어버렸다. 새 땅에 정착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 불은 할머니 순자가 쓰레기를 태우다 낸 것이었다. 순자는 풍으로 몸 한쪽을 쓰기 힘들게 된 상태였다. 가족을 돕기 위해 찾아온 그가 가족의 짐이 된 상황. 어떻게든 소소한 집안일을 돕고, 쓰레기를 태우는 일이라도 하려는데 그만 창고를, 가족의 노력이 오롯이 담긴 그곳을 태우고 말았다. 무엇이라도 건져보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뒤로 하고, 할머니는 떠난다. 사라지는 것만이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데이빗은 그런 할머니를 막는다. 그렇게 영화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닥에 모여 자는 네 가족을 바라보는 순자의 시선처럼. 가족을 미화하지도, 상처와 갈등에 빠져 허우적대지도 않는다. 여느 가족이나 가지고 있는 슬픈 이야기를 담담하고 소박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질문으로 끝난다. 몸이 불편한 순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족은 아칸소에 제대로 정착했을까. 나아가 어린 데이빗은 미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찾았을까.
시골에서 불이 나는 일은 종종 있다. 우리 집에도 큰 불이 났다. 축사가 여럿 타버렸다. 당시에는 돼지도 여럿 길렀는데, 돼지가 모두 타 죽어버렸다. 사실 불행은 이후에도 여럿 있었다. 장마가 와서 둑이 무너져 농장이 물에 잠기는 일도 있었고, 태풍에 축사가 날아가는 일도 있었다. 결국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아버지는 양계장을 접었다. 그렇게 시골살이는 나에게 하나의 아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데이빗 가족은 어땠을까? 비옥한 땅은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상징한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려면 물길을 찾아야 한다. 영화는 물을 찾는 두 가지 길을 보여준다. 하나는 할머니가 찾은 개울이다. 그곳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미나리 밭을 보며, 제이콥은 데이빗에게 말한다. '할머니가 좋은 곳을 찾았구나.' 억척스럽게 자라는 미나리처럼, 이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는 병아리가 미나리가 되는 이야기라 해도 좋다. 연약한 병아리가 억척스런 미나리가 되는. 어디서나 잘 자라고 마구 뻗어가며. 할머니와의 기억을 간직한 데이빗의 미래도 그렇지 않을까. 또 다른 이민 1.5세대, 2세대 역시.
또 다른 길은 현지 이웃의 도움을 빌리는 길이다. 제이콥은 수맥을 찾기 위해 결국 이웃의 도움을 빌린다. 미신을 숭배하는 이 미국인을 제이콥은 처음에 믿지 않았다. 머리를 써야 한다며 고집을 피웠지만 결국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성적인 동양인 제이콥과 주술과 신비에 빠진 백인 미국인이라는 기묘한 대립. 영화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어놓은 이 구도를 통해 한 사회에 정착하려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새롭게 그려낸다. 그 속에 얼마큼은 젖어들어야 뿌리릴 내릴 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주민이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미국의 합리주의, 시민정신 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는 점에서 <미나리>는 확실히 진일보한 데가 있다.
소박한 억척스러움. 영화의 감동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줄이겠다. 낯선 곳에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고된 일이다. 절망과 싸워야 하는 일이며 묵묵히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미국인이 이 영화에서 다른 것을 보았다면 아마 이것이 아닐까. 여기에는 거룩한 개척정신도, 숭고한 가족의 희생도, 짜릿한 성공의 결실도 없다. 살아내야만 했던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자. 내가 영화를 보며 내내 슬펐던 것은 오랜만에 살아내고자 애썼던 내 가족의 과거를 엿보았기 때문이고, 대를 이어 지금도 살아내고자 나름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