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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Dec 07. 2021

시작이 있어서 끝이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연구실 동료들과 조촐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코로나로 그간 얼굴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생각보다 시끌벅적하네요. 헤아려보니 한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난 게 꽤 오랜만입니다.


연구실 동료들과는 <저층지성>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비정기적으로 발간하고 있습니다. 그간 세미나 발제문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는 것이지요. 흩어져있던 글을 모으니 약 170여 페이지의 두툼한 잡지가 되었습니다. 돌아가며 실린 글을 읽었습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글도 꿰어야 책이 됩니다. 흩어진 단어를 모아 문장을 짓고 글 한편,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것처럼 그 글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으니 낯설고 신선합니다. 책으로 엮여 종이에 인쇄된 문장들은 모니터 속에서와는 전혀 다른 말을 건넵니다.


시큰둥하게 글을 읽으며 둘러보다 짜르르 가슴을 울리는 한 문장을 발견합니다. "나는 생존의 길로 나를 이끌 욕망의 힘을 믿는다." 욕망이란 대관절 무엇일까. 누구는 파멸로 이끄는 악마의 손짓처럼 이야기하던데… 최근에 읽었던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의지로 이야기하지 않았던지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오래도록 절망의 바다를 헤매었습니다. 나를 끌어당기는 인력의 손아귀가 너무 끈덕지게 밑으로 밑으로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그 정체를 명확히 헤아리기는 힘들지만 좌절감이라 이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패했다는 인식, 길이 끊어졌다는 당혹스러움.


<저층지성>을 돌려 읽고는 옛 글을 찾아 읽었습니다. 처음 연구공간에 발을 들이면서 썼던 글을 서로 찾아 읽어보았지요. 서툰 문장들, 절절한 자기 고백, 당돌한 목표 등. 서로의 옛 글을 보며 까르르 웃기도 했습니다. 자신에게는 흑역사이겠지만 다른 동료들에게는 재미난 이야깃거리입니다.


안타깝게도 제 옛글을 발굴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실험자들의 전신 수유너머 R, 그 이전 수유+너머에 발을 들이며 쓴 글은 십년도 더 넘었으니까요. 오랜 유물이 남아있는 하드디스크를 들쑤셔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5년 전까지 기록만 남기고 나머지를 싹 삭제해버렸었네요.


십수 년 전 쓴 글을 지금 보면 어떨까. 우습기도 할 테고, 손발이 오그라들듯 기괴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필시 그 순박한 열정이 부러울 것입니다. 네, 분명 그때에는 열정이라 부를만한 것으로 충만한 시절이었습니다. 대관절 그 열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헤아려보면 좋은 상황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지방대를 졸업하고 무작정 홀로 상경하여 대학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만, 여러 차례 탈락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학비 마련이 어려워 장학금이 있는 학교의 문을 수차례 두드렸는데... 몇번째였을까. 무작정 지원하는 이를 가엽게 여긴 면접 교수는 '그것도 실력'이라며 은근히 다른 길을 권했습니다.


스무 해가 거의 다 되어서야 그 의미가 새록새록 새겨지는 것을 보면, 정작 당시에는 그 말에 별로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말처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처럼 이것저것 재보지 않고 달려드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좌충우돌의 시간 속에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만났고 그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아무래도 작은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작은 마침표, 적어도 쉼표를 찍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실, 지난 모임은 공간 정리  겸하는 자리였습니다. 해방촌 시대를 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 <저층지성>의 제호도 '해방 of 해방(촌)'으로 붙였으니까요. 오랜 해방촌 시대를 마무리하고, 물리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것을 잠시 그치기로 했습니다. 네, 제가 몸 담았던 해방촌 우리실험자들과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합니다.


해방촌 시대를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까마득히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유+너머가 원남동 시절을 정리하고 해방촌으로 이주하는 때를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수유+너머가 해방촌으로 이주를 결정하면서 저도 해방촌에 굴러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수유+너머가 이곳저곳으로 나뉘고, 수유너머R은 해방촌을 떠나 삼선동으로 이주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해방촌으로 돌아왔고, 그 공간이 지금의 우리실험자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실험자들 공간을 정리한다니 꽤 슬프게 받아들이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정작 연구실 회원들은 유쾌하게 이별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아쉬움이 남지 않을 정도로 그 시간을 충실하게 보냈기 때문이 아닐지요. 아쉽다고 하기에는 그 시간의 분투와 노력, 말 그대로의 '실험'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하여 상실이 상실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말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해방촌 우리실험자들의 공간은 사라지지만 우리실험자들은 온라인을 통해 계속 활동을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 미래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온라인 전환일지, 아니면 말 그대로 새로운 '실험'일지. 


우리실험자들의 미래와는 별개로 저는 개인적으로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매우 사적인 공간이겠지만 또 과거의 인연이 흘러들어오는 공간일 것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간 헤매었던 절망의 바다에서 벗어나 욕망의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점은 알겠습니다. 제 자신을 괴롭혔던 실패라는 그림자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저 옛날, 좌절을 모르고 문을 두드리던 건강함이 저에게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시절 호기롭게 꿈꾸던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늘 속을 썩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을 희망으로 전환하지 않으며, 다만 욕망의 힘을 빌어봅니다. 물리적 공간을 벗어난 연구공동체의 활동은 무엇일까. 새 공간을 열어 무엇을 할까. 정해진 것은 없고, 희망이라는 것도 까마득히 멀기만 합니다. 그러니 꿈틀거리는 욕망의 파도에 맡겨보렵니다.


출렁이는 욕망의 파고가 어디로 이끌지 모르겠습니다.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지, 아니면 황량한 사막, 혹은 아무도 없는 무인도,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하늘 아래 막막한 곳일지 모릅니다.


시작이 있어 끝이 있습니다. 함께 꾸렸던 공간과의 이별이란 언젠가 맞이해야만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이사가 아닌, (온라인 공간으로의) 이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끝이 있어 시작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개인 공간을 꾸려봅니다. 그곳의 실험 결과가 침몰일지 순항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좌절의 닻을 끊고 욕망의 파고에 맡겨보고 싶습니다. 표류하지 않고 어딘가 닿았을 때, 또 소식을 전하기를 기원하며…




* 매일(월~금) 메일링을 통해 새로운 글을 보내드립니다. https://zziraci.com/mai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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