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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Dec 15. 2021

노자 QnA


<노자의 맨얼굴>(https://brunch.co.kr/@zziraci/596)에 대한 답신을 받았습니다. 몇 가지 질문이 함께 있는 바, 간단히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붙이려 합니다.



1. 老子의 道는 사상적/철학적인 의미보다는 현실정치에서 활용할 수 있는 수단/방편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인가?


<노자>의 철학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노자>의 특정 부분을 현대철학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여럿 있었습니다. 언뜻 생각나는 것으로는 박이문의 <노장사상>, 김형효의 <데리다와 노장의 독법>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노자>의 제왕학적인 측면, 나아가 병법가적인 측면에 주목한 연구도 있습니다. 강신주와 김시천의 해석이 대표적이며, 리쩌허우 등도 이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중국철학은 본질적으로 정치철학적 요소가 다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에 대한 비판, 이해, 국가에 대한 통찰, 비전 등을 제각기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뜻입니다. 이때 어디에서 국가/권력을 사유하느냐가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공자는 관료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유랑하는 사상가였으며, 맹자는 임금의 정치고문이 되고자 하는 자신감 넘치는 사상가였습니다. <논어>와 <맹자>를 가르는 이 둘의 차이는 매우 크다 생각합니다.


김시천이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에서 말했듯, <노자>의 청자는 향후 통일제국을 이끌 제왕이며 <노자>의 화자는 숨어서 그에게 비밀스런 지혜를 건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자>는 현실적인 권력의 속성, 목적을 위해서는 다른 수단을 취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이야기를 전해고 있습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기술이며, 제 목적을 숨기고 원하는 바를 취하는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면에서 <노자>는 여러 구체적인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노자>의 철학적 면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왕필' 혹은 현대의 해석을 경유하며 선명하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노자> 텍스트 자체를 풍부하게 해석했을 때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 편이며, 그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따라서 저는 줄곳 <노자>가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텍스트인지를 의문시하고 있습니다. 



2. 그렇다면, 왜 이렇게 老子가 높이 평가받고 《老子》가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인가? 道敎로 인해 老子가 神格化되면서 그의 말도 절대적인 권위를 갖게 된 것인가?


텍스트로서의 <노자>, 그리고 노자의 신화는 서로 다른 경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상 떼어보면 둘은 영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노자>라는 제목의 책을 노자의 신화와 연결시키면서 그 텍스트의 권위를 한층 높이게 된 점이 있습니다. 저자로 상상되는 인물에게 덧씌워진 신화가 텍스트를 신격화하는데 적잖이 역할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런 신화는 시간을 거치면서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도교적 양생술=신선술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여 그 신화적인 면을 더 강조하고, 이에 따라 <노자> 텍스트의 권위도 덩달아 올라가습니다. 한편 오늘날에는 전통철학=유가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노자>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습니다. 동양의 신비를 가장 잘 담아내는 텍스트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자>에는 몇 가지 선이해, 혹은 기대가 덧씌워져 텍스트 본연의 내용을 읽는 것을 방해한다 할 수 있습니다. 노자에 대한 신화, 전통적인 도교적 양생술, 동양을 신비화하는 오리엔탈리즘 적 접근. 저는 이런 요소를 걷어내고 <노자>를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3. 老子와 莊子는 어떻게 다른가? 老子가 권력과 통치를 말하고 있다면, 莊子는 권력을 초월한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맞나? 권력(지배)의 긍정 or 권력(지배)의 부정?


이에 대해서는 긴 글이 필요하겠습니다. 간단히만 이야기하면 道에 대한 풍부한 탐구는 <장자>에 더 많이 담겨 있다 생각합니다. <장자>의 道를 일부 떼어 <노자> 해석에 이용한다고 할까요. <장자>가 <노자>보다 앞서며, 혹은 동시대 텍스트라 하더라도 철학사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자>가 제왕을 위한 교훈이라면, <장자>는 소수자 - 버려진 자를 위한 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장자>는 권력의 현실적 폭력을 아주 예민하게 다루었습니다. <장자>에서 상처입지 않고, 상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장자>에서 경계하는 것은 사회적 폭력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자>는 권력을 초월하기는커녕, 현실적인 권력 아래에 살아갈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안명安命론이 비판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종의 정신승리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권력=폭력에 저항하지 않되, 그에 순응하는 삶을 지향한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道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장자>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이때의 자유란 현실의 한계를 깨뜨려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신적 자유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다른 삶의 길을 창조하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라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4.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老子를 너무 깎아내리는 게 아닌가?


<노자>를 너무 깎아내리는 것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경전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으며, 과거의 사상을 전통이라고 묵수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현재적 문제에서 과거의 것을 평가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폐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는 현대 독자에게 주어진 권력이며, 책임이기도 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노자를 너무 깎아내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치켜세웠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텍스트를 신비화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것. 그것은 해석을 방해하며, 나아가 철학적 탐구로서의 본연의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사유는 비판에서 출발하고, 비판은 늘 현실의 문제로부터 싹틔우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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