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픈옹달 Feb 28. 2022

정직이라는 이름의 악마

<오셀로>를 읽고

이아고 : 우리가 이리되고 저리되는 건 다 우리한테 달렸어. 우리 몸은 정원이고 우리의 의지는 그 정원사야. … 그렇게 할 힘과 바로잡을 권한은 우리의 의지에 있다네. 우리의 삶이라는 저울에서 한쪽의 이성이 다른 쪽의 욕정과 균형을 맞춰주지 않는다면 우린 본성의 저급한 욕정에 이끌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맞을 거야. (59쪽)


<오셀로>는 한 인간의 파멸을 보여준다. 그는 강직한 군인이었으나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졸라 죽이고, 검으로 스스로를 찔러 죽는다. 무엇이 그를 참혹한 살해로 이끌었을까. 아마도 거기에는 그가 무어인, 북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라는 점이 큰 이유였을 테다.


오셀로는 한 때 노예였으며 데스데모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인물로 묘사된다. 인종, 문화, 나이까지 둘은 사회적으로 영 어울리지 않았던 짝이었다. 둘 간의 혼인 소식을 듣고 데스데모나의 아버지 브라반티오는 '추악한 마법'이나 '혼미하게 만드는 약이나 광물'로 데스데모나를 더럽혔을 것이라 확신한다.(43쪽) 


자신 대신 카시오를 부관으로 앉힌데 앙심을 품은 이아고는 이아고와 데스데모나 사이를 갈라놓는다. 데스데모나와 카시오 사이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며 오셀로에게 슬쩍 심어둔 의심의 씨앗은 살인으로 꽃 피운다. 그렇게 오셀로는 자격지심, 질투에 물들어 부서진다.


오셀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오셀로>의 주인공은 당연히 오셀로이다. 그러나 <오셀로>를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기수, 이아고가 더 인상적일 것이다. 그는 모든 사건의 흑막이다. 교묘한 말투로 그는 모든 사람을 무너뜨린다. 그의 아내  에밀리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복잡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관절 그 악행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앞서 카시오가 부관이 된 것에 앙심을 품었다 말했다. 그러나 이는 그 악행의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는 카시오가 누린, 부관으로서의 명예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셀로가 자신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망상을 품기도 하지만, 그 스스로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이런 것들은 그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 지어낸 이유는 아닐까.


무엇보다 그는 극중의 모든 인물에게 신뢰를 받는다. 만약 이아고와 같은 인물이 있다면 모든 인간을 파멸로 몰고갈 수 있으리라. 그 교묘함, 섬뜩한 지혜가 그의 매력이다. 그는 결코 가까이하고 싶은 인물은 아니나 계속 눈길을 끄는 인물이다. 그래서 질문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그는 대관절 왜!?


충분한 설명이 없을 때에는 이야기가 담아내지 못하는 다른 사연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설정 놀음이라 하자. 그 가운데는 이런 상상도 있었다. 이아고가 오셀로를 사랑했다면? 실제로 <오셀로>는 사랑은 곧 질투로 돌변할 수 있으며, 참혹한 결말을 낳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사랑 이외에, 이아고와 오셀로의 사랑을 그려보면 어떨까. 오셀로에 대한 이아고의 집착, 카시오와 데스데모나에 대한 질투, 죽음에 대한 강한 충동까지. 


상상은 의외로 딱딱 들어맞는다. 오셀로는 카시오를 아끼며, 데스데모나와 몰래 혼인을 올렸다. 따라서 이 둘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고자 음모를 꾸몄다면. 나아가 실현될 수 없는 욕망, 동성애적 관계를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대상 오셀로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라면. 


물론 작품은 이런 해석에 대해 별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여러 해석 가운데 동성애를 이유로 분석하는 관점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얼마나 설득력있는 해석으로 두루 인정받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의 이런 생각에 일부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셀로>를 읽은 당신, 그대의 해석은 어떠한지.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달리 읽힌다. 앞서 동성애적 관계에 사로잡혔다면 이번에는 이아고에 따라붙는 수식어가 나를 붙들었다. Honest Iago. 특히 오셀로는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그를 부른다. '정직한 이아고' 이아고의 음모를 아는 독자는 오셀로의 말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정직은 개뿔. 그러나 작중에서 이는 비단 오셀로의 생각에만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이아고에게 호의를 품고,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대관절 왜!? 


셰익스피어는 그를 정직의 화신으로 설정한 듯하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를 찾아 속내를 털어놓지. 그러나 그렇다면 왜 그를 악인으로 그렸을까. 어쩌면 그것은 정직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함은 아닐까? 만약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 놓는다면, 우리가 무시하고 감추어 두었던 것을 모조리 드러내면 어떻게 될까. 욕망과 충동이 정직을 만나는 날엔 어떤 미래가 열릴 것인가.


이런 질문이 의미있는 것은 작품을 읽고 데스데모나의 살해가 누구 때문인가 하는 물음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아고인가 오셀로인가. 흥미롭게도 에밀리아의 폭로는 이아고의 무고함을 입증한다. "질투하는 이들에게 그건 답이 아니에요. / 그들은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 질투하기 때문에 질투해요. 그것은 / 스스로 생기고 태어나는 괴물이랍니다."(124쪽)


이아고가 없었다면 오셀로와 데스데모나는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그들은 여느 동화속 용사와 공주처럼 영원히 행복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아고는 그저 그 시간을 앞당겼을 뿐이다. 몇 가지 진실을 통해. 실제로 오셀로는 작품 속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다. 그렇게 질투는 진실을 - 설사 일부의 진실이라 하더라도 - 먹고 자란다.


생각해보면 진실이란 한없이 불행한 것이다. 모든 속내를 남김없이 내놓는다면 어떤 관계도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사랑이 그렇다. 사랑이 가능한 것은 정직하기 때문이 아니라 망각하기 때문 아닌가. 눈에 콩깍지가 씌지 않으면, 일부를 무시하지 않으면 사랑은 시작되지도 않는다. 그렇게 사랑은 한쪽 눈으로 하는 것이다.


가리어진 것이 이아고에 의해 까발려졌을 때 이아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인종, 나이, 계층 등등.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루었다면, 이제는 그런 차이 '때문에' 사랑을 지속할 수 없다. 한 끗 차이이다. 이아고의 잘못이 있다면 그저 보여주었을 뿐이다.


사건의 전모를 알고 오셀로는 이아고를 찌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아고는 죽지 않는다. 찌르면 바로 죽는 셰익스피어 희곡에서 이아고는 피를 흘릴 뿐 죽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살려둘 작정이다. 


오셀로 : 네 놈이 악마라면 죽일 수도 없겠지. (이아고를 해친다.)

이아고 : 피만 나고 안 죽었소. (175쪽)


옛사람은 악마는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피를 흘리나 죽지 않는 이아고야 말로 악마의 현현이라 하겠다. 이아고는 그렇게 살아서 무대가 막을 내릴 때 퇴장한다. 사건의 뒤처리를 맡은 로도비코는 '지옥 같은 악당(178쪽)'을 고문하겠다며 막을 닫는다. 과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악마는 영원한 심판에 고통을 당하고 있을까?


도리어 독자-관객은 거꾸로  기묘한 환영에 시달릴 테다. <오셀로>의 막이 내렸을 때, 그들은 살아남은 이아고와 함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이아고가, 작품 <오셀로>가 뿌린 의심의 씨앗을 품고 말이다. 이 작품이 선사하는 기묘한 불쾌감, 어떤 찝찝함은 작품속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독자-관객에게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과연 정직한 이아고는, 악마가 진실의 말로 속삭일 때 우리는 이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오셀로>를 읽으며 좀 무서웠다. 이아고 때문이 아니라 오셀로 때문에. 오셀로와 같은 질투, 열등감, 분노 따위가 어찌 없다 하겠는가. 그는 소설속의 인물에 불과하고 나는 충분히 그런 유혹을 감당할 위인일까. 최근 한 요리사의 폭행 장면이 겹쳐 떠올랐다. 나는 얼마나 그 충동에서 떨어져 있을까. 


욕망, 충동, 분노 등등이 진실을 무기로 눈앞에 닥칠 때 도무지 상대할 자신이 없다. 기껏 내가 생각한 것은 도피, 무시, 망각 따위 등이다. 너그러움이라는 미덕은 진실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고 망각하는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나는 도망치는 비겁한 길을 겨우 찾아내었다. 




* 인용문 페이지 수는 민음사 최종철 역, 비극에디션 기준입니다. 도서정보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aladin.kr/p/T4JbE 


* 뉴스레터로도 전달해드립니다. 기픈옹달의 글을 받고 싶으시면 다음 링크에 메일 주소를 남겨주세요.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2513


작가의 이전글 '가로 왈' 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