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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Apr 21. 2022

<논어>, 배움을 사랑한 사람

올라서당 고전명문선 2강

정자께서 말씀하셨다.
"논어를 읽는데 읽고 나서 전혀 아무런 일이 없는 사람이 있고
읽고 나서 그 가운데 한 두 구절을 얻어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
읽고 나서 그 글의 진가를 알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읽고 나서 바로 자신도 모르게 손과 발이 춤추며 뛰노는 사람도 있다."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知好之者
有讀了後直有不知 手之舞之足之蹈之者


독서란 독특한 경험이다. 문자를 읽어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떤 사람은 글의 시대가 끝났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영상의 시대, 음성의 시대. 그것은 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고, 글 이후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여전히 글을 읽고 살고 있다. 독서讀書,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체험의 공간, 만남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경험에 흠뻑 젖은 사람은 저도 모르게 손과 발이 춤추며 뛰논다고 말한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그러나 가슴 뛰는 경험은 있었을 테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이 펄떡펄떡 뛰면, 둠칫둠칫 그 리듬에 어깨춤이 나올 수도 있지 않나.


<논어>는 오래도록 사랑받은 책이다. 그러나 박제처럼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유가의 포스 때문이다. 갓을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는 샌님 선비들 때문이다. '공자님, 공자님!' 하면서 두 손으로 받드는 이들 때문이다. 지나친 존숭은 감동을 앗아간다. 거기에는 일방적인 순종과 찬탄만 있을 뿐이다. 박물관을 둘러보듯, 이름난 유물을 들여다보듯 <논어>를 읽어서는 안 된다. 그랬거니 고개를 끄덕이며 무한정 겸허한 태도로 읽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는 콩닥콩닥 가슴 뛰는 일은 가당치도 않거니와 꾸벅꾸벅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따분함만 있을 테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 
서른 살에는 홀로 섰고, 마흔 살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지. 
쉰 살에는 하늘이 나에게 맡긴 일을 알았고, 예순에는 귀가 순해졌다.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대로 행동하더라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논어>의 주인공은 공자이다. 공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짧은 술회를 남겼다. 일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 말은 <논어>에 남겨진 그의 유언과도 같은 말이다. 이 말은 하나의 표본이 되어 동아시아인의 삶을 규정한다. 서른 = 이립 / 마흔 = 불혹 / 쉰 = 지천명 / 예순 = 이순 / 종심 = 일흔.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가 들면 철이 든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삶은 여전히 출렁이며 요동치고, 덩달아 감정도 하늘로 솟아올랐다 땅으로 처박힌다. 격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도 나름 태연히 속내를 숨길 수 있다. 성숙보단 뻔뻔함이 나이 듦과 가깝다. 낯이 두껍고, 표정이 낡아 제법 엣햄엣햄 있는척하기 좋다. 공자의 저 말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럼에도 공자를 성인으로 떠받드는 이들은 저 말을 거짓부렁이라 보았다. 겸손하게 한 말이라는 뜻. 실제로 공자는 나면서부터 성인이라나 뭐라나. 소박한 자기 고백으로 읽는 방법도 있다. 예순이 되어 귀가 잘 들리지 않았고, 일흔이 되어 기력이 쇠해 별 탈 없이 살았다고. 하튼, 공자는 자신의 삶을 배움에서 시작한다. 배움(學)이야말로 공자를 공자답게 만든 계기임에는 틀림없다. '지志', 뜻을 품는다는 것은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방향이 있어야 진전이 있지 않겠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집이 되는 작은 마을에도 나처럼 참되고 믿음직스런 사람은 있겠지.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않을 거야."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공자의 자랑. 그는 스스로 '호학好學'하는 사람으로 자처한다. '충忠', 참된 마음과 '신信', 믿음직스러움은 <논어>에서 강조되는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괜찮은 사람은 어디나 있는 법이다. 모난 성품이 있고, 반듯한 성품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삶은 불행하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규범적 전제일 뿐, 실상 우리는 늘 차이를 경험하며 산다. 엄친아의 실존.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데다, 성격도 좋다. 집안도 좋고, 키도 크고, 행운까지 타고난. 


예로부터 이 우울을 해결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못된 방법을 제외하면... 천국을 상상하든, 아니면 영혼이건 이성이건 동질한 무엇이 있다고 믿든. 공자 이래로 배움을 제시한 전통도 있다. 배움이란 자기를 고귀하게 성장시키는 과정이며, 그렇게 덕을 쌓아 나름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여 배움이란 한가히 책상 위에서 벌이는 지식 놀음이 아니라, 나름 절실한 분투이다. 목 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 거기엔 어떤 갈급함이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종일토록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으며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다 쓸데 없더라. 배우는 것만 못해"

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더라. 둘 가운데 무엇이 더 문제일까? 끝없는 욕망? 잘못의 반복? 공자는 후자를 이야기할 테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존재다. 이유는? 비슷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인간의 생각이란 다 거기서 거기란 말씀. 어쩐지, 내가 그럴싸하다고 생각한 아이템은 벌써 누가 일찌감치 팔아먹어 치웠더라. 


공자는 생각 좀 그만하고 배우라 말한다. 종일토록 골몰하고 끼니를 거르고 잠을 미루어도 풀리지 않는 건 풀리지 않는다. 글을 읽고 깨치는 것이 더 낫다. 이런 면에서 공자는 과학자나 수학자가 되기엔 틀렸다. 끼니와 잠을 미루고 새로운 발견을 한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거꾸로 인문학이란 이 지긋지긋한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낡은 흔적을 들추는 학문이다. 그래서 별로 신통치 않아 보이기도 한다. 별반 새롭지도 않은 것을 저렇게 근사하게 늘어놓는다니. '인문학적 개소리'라는 게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래도 개 중에 종종 탈출구가 있기도 하다. 무릎을 치고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길이 있다.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물었지만 자로가 대답하지 못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하지,
그 사람은 배움에 열중하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에 근심도 잊는다고.
게다가 늙어가는 것도 모를 뿐이라고 말야."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찐 학습 덕후 공자님이시다. 공자님 대단도 하시네요~ 하고 흘려 들어볼 만한 장면이기도 하다. 사연을 보면 그렇게 시큰둥하게 보지 않아도 된다. 섭공은 초나라의 정치적 실력자, 자로는 언행에 거침없는 제자였다. 무엇 때문에 자로는 침묵했을까. 공자는 긴 시간 방랑했다. 꽤 처량하고 고된 여정이었다. 섭공의 비아냥과 자로의 창피함을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다. 그래 당신 선생이 유명하던데 뭐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자로는 마땅히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명함으로 내밀 만한 게 없었다고 하자.


공자의 말은 소박하기도 하다. 노회한 학자가 내뱉는 자기 자랑. 섭공 같은 사람은 그 말을 들었더라도 그저 흘려들었을 테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을까? 그렇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공자라고 근심이 없었을까. 늙음이란 아무리 무시하고 싶어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삶을 고달프게 만든다. 때론 거꾸로 독해법이 필요하기도 하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처럼 삶을 칭칭 동여맨 말이 있나. 공자의 근심, 노쇠... 공자 본인의 말을 들은 자로는 어땠을까? 무릎을 치며 대답할 말을 찾았다고 기뻐하지는 않았을 테다.




선생께서 강가에서 말씀하셨다.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도 않아."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변한다고 말했다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그렇게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엉뚱하게 말을 돌려보기 좋아하는 동양의 현자는 이렇게 딴죽을 걸었을 테다. 물이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고. 무상無常의 항상恒常. 공자가 보았던 강물은 그 누구도 볼 수 없을 테다. 공자 자신도. 그러나 그 강물은 지금도 콸콸 흘러갈 테지.


하여 삶이란 그렇게 무심히도 흐르는 것. 흐르고 흐르며 살아내고 살아내는 것. 한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공자는 무엇을 보았을까. 흘러간 과거를 추억하며 노쇠함을 한탄했을 수 있고, 자신과 상관없이 야속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인생의 초라함을 생각했을 수도. 반대로 흐르고 흘러 강물이 닿을 먼 곳을 헤아려보았을 수도 있으며, 흐르고 흐르는 강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살아내야 하는 삶을 생각했을 수도. 빈칸이 많아 <논어>는 읽는 맛이 있다. 




* 올라서당 - 고전명문선 2강 교안입니다.

https://zziraci.com/onl-seodang/ 


* 교안에는 한자 쓰기 및 문법 풀이가 함께 있습니다. 교안이 필요하신 분은 댓글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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