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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Sep 05. 2022

일통천하, 최초의 황제 시황제 이야기

와파서당 초한전쟁

自今已來除謚法 朕爲始皇帝
後世以計數 二世三世至于萬世 傳之無窮


이제부터 시법謚法을 없애노라. 짐은 '시황제'라 부른다.
후대의 황제들은 숫자를 세면 될 것이다.
이세, 삼세에서 만세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전하도록 하라. 
<사기 : 진시황본기>


진시황은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됩니다. 그가 처음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훗날 대대로 기억되는 인물이 되리라 생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워낙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당시 나라의 권력은 여불위의 손에 맡겨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실제로 진시황은 여불위를 아버지처럼 여기며 그에게 나라의 모든 일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 임금의 욕망은 새롭게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자 모든 권력을 손에 쥡니다. 여불위는 멀리 귀양 보내버립니다. 


과연 그는 어떻게 여불위와 같은 권력자를 내쫓고 단번에 나라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몰래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불위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린 임금은 남몰래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이용할지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사와 같은 재능 있는 인물의 활약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불위를 내쫓고 나라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쥔 뒤, 진나라는 차례로 나머지 나라들을 집어삼킵니다. 빼어난 장수들의 활약과 모사들의 계책, 진시황의 결단력이 서로 맞물려 진나라는 파죽지세破竹之勢, 거침없이 나머지 나라들을 차례로 집어삼킵니다. 물론 여기에는 진나라의 기틀을 닦은 여러 인물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 상앙, 장의, 백기 같은 인물들의 역할도 진시황의 통일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진시황의 통일 과정 가운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장 커다란 위기로 진시황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았던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연나라에서 보낸 자객 형가가 궁궐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빼어 들고 진시황의 목숨을 노린 사건입니다. 다행히 진시황은 목숨을 건졌고, 형가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형가의 암살 시도 때문이었을까. 진시황은 오롯이 홀로 우뚝 선 권력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함부로 올 수 없었고, 신하들도 진시황을 쉬이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홀로 높은 권력의 중심에 있고 싶었습니다. 나머지 여섯 나라를 정벌한 뒤, 이전과는 다른 호칭을 만들라고 명합니다. 이전까지 최고의 권력자를 왕王이라 불렀다면 자신은 왕보다 더 높은 존재로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호칭이 탄생합니다. 본래 신하들이 올린 호칭은 황제가 아니었습니다. 태황泰皇이라는 호칭을 만들어 올렸지만 진시황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하들이 올린 태황에서 '황皇'을 남기고 옛날 전설의 성인에게서 '제帝'라는 호칭을 가져와 '황제'라는 새로운 호칭을 만듭니다. 그렇게 그는 최초의 황제 '시황제始皇帝'가 됩니다. 따라서 앞에서 편의상 진시황으로 그를 불렀지만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입니다. 시황제는 천하통일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이름이니까요. 


진시황은 이전의 방식, 시호謚號를 붙이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시호란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행적에 따라 그를 부를 이름을 만드는 것입니다. 시황제가 보기에 그것은 신하가 임금을, 아들이 아비를 평가한다는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감히 누가 자신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는 아무에게도 평가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시호를 붙이는 방법, 시법을 폐지하라 명합니다. 


그렇다면 황제들을 어떻게 달리 불러야 할까. 여기에 시황제가 내놓는 해법이 재미있습니다. 자신은 황제를 시작한 사람이니 '시황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이후부터는 숫자를 세어 호칭으로 삼으면 된답니다. 이세황제, 삼세황제... 이어서 만세까지. 그렇게 부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바람대로 역사는 그를 시황제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시법謚法을 없애노라. 짐은 '시황제'라 부른다. 후대의 황제들은 숫자를 세면 될 것이다. 이세, 삼세에서 만세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전하도록 하라." 그러니 진시황秦始皇이라는 호칭보다 시황제라는 호칭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황제 시황제는 오직 한 사람뿐이니까요. 진나라가 무너진 이후에도 황제는 수 없이 많았지만, 누구도 최초의 황제라는 이름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191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기까지 무려 약 2,000년가량 황제 제도가 이어집니다. 수 없이 많은 나라가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황제의 자리는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물론 시황제의 꿈처럼 되지는 않았습니다. 시황제가 죽자 이세황제가 자리를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삼세황제까지는 가지 못했어요. 진나라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커다란 혼란에 휩싸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유방의 한나라에 의해 다시 통일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 이후 황제라는 호칭은 남았으나 진시황이 없애라 명령했던 시법은 다시 부활합니다. 


이세황제는 아버지 시황제의 무덤을 커다랗게 만들었다고 해요. 최초의 황제답게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거기에는 하늘의 모양을 수놓고 천하의 지형을 본떠 꾸며놓았답니다. 한편 그의 무덤 앞에 수많은 병사를 두어 진시황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둘 수 없으니, 실제 사람 모양의 크기의 흙인형을 빚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은 어디 있는지 알 수없도록 무덤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고 해요.


전설 속에 묻힌 무덤이 1970년대 한 농부의 손에 의해 발굴됩니다. 지금도 수많은 흙인형들이 최초의 황제의 위엄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를 병마용兵馬俑이라 부릅니다. 병사[兵]와 말[馬]의 흙인형[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병마용의 뒤의 진시황 무덤은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채 잠자고 있다고 해요. 




* 와파서당 : 고사성어로 읽는 ‘초한전쟁' 교안입니다. 전체 교안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zziracilab/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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