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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일기 25.09.18

만남

by 기픈옹달
집에 고양이 4마리와 함께 살고 있어.

나에게 시큰둥한 아이들은 살짝 들떠 질문한다. 고양이 얼굴도 보지 않았는데 무작정 귀엽다느니, 좋겠다느니. 하긴 고양이를 넷이나 거느리고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첫째가 2011년 가을 생이니, 벌써 15살이다.


이름은 '꽃돌이'. 병치레 없이 10년 넘게 잘 살았는데, 지난 여름 크게 앓았다. 비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했다. 조직검사결과 혈관육종이란다. 예후가 아주 좋지 않다는 이야기와 함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수술 후유증 때문이겠지. 수술 후에 영 비실비실 하더니 그래도 최근에는 기운을 부쩍 차려서 아침저녁으로 밥을 내놓으라며 울어댔다.


어제부터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다. 어떻게 기어들어갔는지 싱크대 밑에 기어들어가 숨어 있는 것을 꺼내 왔다. 쉰 목소리로 울어대는 것이 아프다 아프다 하는 듯하다. 고민 끝에 병원에 전화했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없단다. 이별을 준비해야지. 야속하고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처음이 아니라 그럴까. 좀 담담하기도 하다. 수술실에 맡길 때부터, 수술하고 집에 돌아온 때부터 언젠가 그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그전부터 어렴풋이 생각하곤 했다. 막상 목전에 닥치니 예전 생각이 자꾸 난다. 15년의 시간이 툭툭 생각나는 것이다.


이별일기를 쓰기로 한다. 며칠을 쓸지 모르겠다. 그래도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두지 않으면 더 후회하겠다는 생각에 자리에 앉았다. 추억만 할 수 있을 때, 뒤늦게 쓰는 것보다는 낫겠지. 예전 사진도 뒤적여보고, 나름대로 그늘을 걷어내기 위해 찾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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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7일. 내 사진첩에 들어있는 첫 사진이다. 아마 이 날 데리고 왔던 것 같다. 길냥이로 누군가 구조해 데리고 있던 아이를 데리고 왔다. 상명대 캠퍼스로 기억한다. 책임비로 1~2만 원을 이야기했는데 서로 정신없어서 돈도 건네지 못했다. 햄버거를 건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참 전부터 고양이를 입양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아기가 있는 집에 고양이를 키워도 될까? 아이 돌보는 것도 힘든데 고양이를 데리고 온다니. 고민 끝에 네이버 카페 게시물을 보고 무작정 데리고 온 아이였다. 인연이 있듯, 묘연이 있다니 연이 닿아 그랬을 것이다.


첫날부터 성격이 좋았다. 낯선 공간에 와서도 호기심이 앞섰다. 구석에 들어가 숨지도 않았고, 빨리 적응하려는 듯 스스로 곳곳을 누볐다. 고양이 수첩을 찾아보니 2011년 7월 출생으로 적혀있다. 생후 3~4개월로 추정한 듯하다.


첫날부터 무릎냥이가 되었다. 고양이를 처음 품에 안고 골골 거리를 듣는 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다행이게도 당시 만 18개월 된 아이와도 잘 지냈다. 어린 냥이라서 무는 버릇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운이 좋은 만남이었다.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 줄 알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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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절

털이 날려 해롭다. 털이 폐에 들어가 막힌다. 병을 옮긴다 등등. 부모는 고양이를 데리고 사는 걸 질색했다. 아이가 있는 집에 털 날리는 고양이라니. 물론 고양이 때문에 청소할 일이 늘었고, 먼지도 늘었고, 옷에 털이 붙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무던하게 서로 잘 어울려 살았다.


청소년 시절이 지나고 성년 시절이 되니 역시나 귀여운 티를 많이 벗었다. 마냥 안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심한 녀석도 아니었다. 적당한 거리.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늘 있었다. 시선을 마주칠 만한 곳. 적당한 거리감이 좋았다.


고양이를 더 많이, 평생 함께할 생각을 했던 건 바로 그 거리감 때문일 테다. 늘 붙어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로 데면데면한 관계도 아닌. 아침에 일어나면 인사를 하고, 이름을 부르면 응답하는 식구. 그렇게 15년간 식구로 살았다. 그간 몇 번의 이사를 거쳤고, 나의 삶도 많이 변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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