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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Feb 28. 2022

'입의 혀 같은 사람'의 힘

다정함으로 무장한 당신 같은 사람


입의 혀 같다 : 일을 시키는 사람의 뜻대로 움직여 주다



입의 혀 같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의 존재로 조직의 일과 관계는 순항할 수 있다. 입의 혀 같은 사람이 희생정신까지 투철할 때는, 사람들은 원래 일상이 자연스럽고 편리한 줄만 안다. 혀 같은 사람의 '상대를 중심에 두는 태도'와 '손해를 감내하는 마음'때문에 공동체에 서로 가시 돋칠 일이 줄어든다. 혀 같은 그 사람이 부재할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허술한 연결로 지탱해 온 조직의 바닥을 확인한다. 그리고 관절처럼 뼈와 뼈를 부딪히지 않게 하던 노력의 진한 실체를 직면하게 된다.


혀 같은 그 사람이 부재할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허술한 연결로 지탱해 온 조직의 바닥을 확인한다.


누군가와 유선으로 조직운영에 대해 의논했다. 주로 대화에서 말이 많은 쪽은 나였고 상대는 듣는 쪽에 서 있었다. 대화는 삐걱거리지 않고 순항했다. 파도가 높지 않았고 감정이 상할 억센 바람이 없었다. 대화의 바다가 평온한가 했다. 전화를 끊고 깨달았다. 상대방의 경청으로 순항한 것을. 그는 내가 쏟은 말에 머물지 않고 심중의 의도와 욕구까지 들었던 것을. 생각나는 대로 쏟아낸 말을 찰떡같이 주워 담아 되돌려준 입의 혀 같은 사람 때문임을.


그는 내가 쏟은 말에 머물지 않고 심중의 의도와 욕구까지 들었던 것을

사람들은 일이 술술 풀리거나 대화가 잘 진행될 때 원인을 헤아리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대화를 헤아려 보니, 저쪽에 선 이가 나의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에 물 흐르듯 흘렀다. 평화는 거저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생색내지 않는 이의 희생, 애씀, 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평화는 거저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생색내지 않는 이의 희생, 애씀, 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정에도 마찬가지다. 제자리에 놓인 살림살이와 때가 되면 차려지는 밥상, 제때 채워지는 쌀통과 욕실에 떨어지지 않는 비누나 샴푸 따위들에서 입의 혀 같은 존재들의 위대함을 만날 수 있다. 문제는 그 굴레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일상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 어찌하겠는가. 입의 혀 같은 사람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좋아서 그랬다'거나 저도 모르게 '길든 것' 때문이라면 말릴 방도가 없다. 최소한 '알아주기' 정도라도 해야 한다.




나란 세계에 사소한 것을 채워주려 누군가 달음질한다면, 허튼 말에 주목하려 누군가 이타적 집중력을 끌어올린다면, 조직의 업무가 구멍 나지 않도록 누군가 자발적 손해를 감수한다면 더없이 감사할 수밖에 없다. 입의 혀 같은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행위 중 어느 것 하나 찬란하지 않은 게 없다. 그들의 자발성에도 한계가 있을 터, 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당도했을지도 모르니. 누군가와의 대화가 수월하다면 스스로 대화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못해도 50%의 공로가 그에게 있지 않을까.


입의 혀 같은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행위 중 어느 것 하나 찬란하지 않은 게 없다.


오늘 어떠한 대화에서 '누군가의 경청'때문에 느낀 기쁨과 감사를 옮겨본다. 이것이 소극적인 '알아주기' 정도에 가깝지 않을까. 다음 알아주기 전략을 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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