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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Nov 02. 2022

가을이면 '시'읽기

문태준 <먼 곳> 읽으며

가을 창가


                                                문태준


늦은 저녁밥을 먹고 어제처럼 바닥에 등짝을 대고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산굽이처럼 몸을 휘게 해 둥글게 말았다 똥을 누고 와 하던 대로 다시 누웠다


박처럼 매끈하고 따분했다 그러다 무심결에 창가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천천히 목을 빼 들어올렸다 풀벌레 소리가 왔다


가을의 설계자들이 왔다


저기서 이쪽으로, 내 귀뿌리에 누군가 풀벌레 소리를 확, 쏟아부었다


쏟아붓는 물에 나는 흥건하게 갇혀 아, 틈이 없다


밤이 깊어지자 나를 점점 세게 끌어당기더니 물긋물긋한 풀밭 깊숙한 데로 끌고 갔다


<먼 곳>에서 '가을 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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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착같이 살려고 애썼다. 그렇게라도 하며 별로인 기분일때 이겨낼 위안을 얻었다. 내 삶의 가치를 내가 하는 행위에 두고 싶었다. 가장 쉽고 표가 나는 방식이다. 그래서인지 계획하지 않고 며칠 온통 뒹굴거려 본 적이 없다. 그런 기회라도 책끼고 다녔다. 그런 모습이 대견 스스로의 뜨거움을 칭찬하며 하루하루 살아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몸이 찌뿌둥할 때가 많고 온 몸이 뻐근하기 시작했다. 통증이나 불편과 불쾌로 몸의 지체를 의식했다. '나에게 손가락 마디가 있었고 약해빠진 발목이 있었구나.' 저절로 발걸음을 떼며 사는 줄 알았더니 수축과 이완의 근육과 마디마다 연골이 열일해 온 사실을 아프면서 발견하 했다. 힘을 줘 치켜떠야 전방 시야가 확보되자 얇은 눈꺼풀의 애씀이 고마다.


그러면서 순간을 알뜰하게 보내려는 습관은 어디서부터 인가 돌아봤다. 멍하게 보내는 시간을 불쾌히 여기는 나는 늘 "죽더라도 다 써먹고 닳아 없어지고 싶다"라는 강인한 좌우명을 새기곤 한다. 물론 다이어리 어느 귀퉁이에도 쓰지 않았지만, 뼛속까지 새겨진 모토로 아침마다 '오늘 또 어떻게 허투루 보내지 않을까'를 궁리했다.


사람의 의지는 유한하다고 한다.  '의지'라는 놈은 양적인 것이며, 한 곳에 몰할 때 많이 사용하면, 나머지에 쓸 여분이 조금 남는다고 한다. 악착같이 하루를 보내려는 의지를 발동할수록 나머지 영역에 쓸 의지가 줄어 문제가 발생한다. 건강뿐 아니라 관계며 양육이나 살림 등 다채로운 곳에 결핍된 의지가 드러나곤 한다. 그래서 대강 사는 법 용납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 지 이 년 차가 되었다. 백신이 가져온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백신 후유증으로 일 년에 준하는 시간을 거룩하게도 허송하며 보냈다. 여기서 허송이라 함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가열하게 달려가는 태도의 부재를 말한다.


이런 와중에 문태준 시인의 '가을 창가'를 만났다.


모든 문장이 늘어지고 시어가 방바닥에 붙어 뒹굴거린다. 들으려 애쓰지 않고 가을의 설계자들이 쏟아붓는 풀벌레 소리를 만끽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나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러면서 화자가 만끽하는 한가로움과 쓸데없는 사소로운 것들로 흥건해지듯 갇히고 싶어졌다. 물긋물긋한 풀밭을 거닐지 않아도 소리로부터 가을은 찾아온다. 가을의 깊숙한 곳으로 끌려가는 화자처럼 늦은 저녁밥을 먹고, 바닥에 등짝을 대고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뒤집어야겠다. 아주 일상적인 용어를 이토록 늘어지게 나열하는데도 모든 시어가 시적이고 감미롭다.


가열하게 밀어붙이는 나의 일상이 "박처럼 매끈하고 따분했다"라는 표현에서 딱 맞아떨어진다 생각했다. 사실 요즘 열정과 계발과 경쟁과 비교라는 세상의 압력에 대해 따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와 태도를 "따분함"이라는 단어로 규정할 수 있는 것만으로 이 시가 나에게 할 일을 다 한 것 같다. 오늘 하루 나는 따분함을 느껴 고꾸라진 마음이 가을의 설계자가 쏟아붓는 소리와 물에 흥건히 갇혀 나아가고 전진하고 승리하고 쟁취하기 위해 엿보는 "틈"을 빼앗기고 싶다. 가을의 흥건함의 밀도에 잠식되고 싶다. 한 달이나 더 된 가을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를 듣고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나는 무엇에 그리 쫓겼던지. 속 시원하게 등짝을 대고 누워 마음을 이리저리 뒤집어본다. 글이라는 방바닥에 비비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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