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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Oct 10. 2019

왕빛나 나무, 알고 보니?

가끔 착시가 필요해.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운전대를 놓을 뻔했다. 그것도 낯선 이름 하나 때문이다.


제법 쌀쌀해진 아침 기온, 차가운 가죽시트에 앉으니 오금이 저린다. 시동을 걸고 서서히 움직이다 낯선 명찰들을 발견했다. 나무마다 걸려있는 명찰이다. 이곳으로 이사 온 후 조경수가 많은 것에 만족하지만 그 이름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누군가의 의견을 수렴해 관리소에서 일괄로 다 붙여 놓은 모양이다. 아파트 유지보수 활동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변화며 가장 만족스러운 실행이다.


내가 나무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것은 육아 때문이다. 아이에게 자연관찰의 눈을 길러주고 싶었지만 아는 게 없었다. 식물이름을 척척 알려주는 앱도 있다지만 이름을 알고 싶을 때 찾아보는 게 익숙하지 않아 늘 질문으로 끝났다. 아이들은 물어도 대답 없는 엄마의 무식에 질문하기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고 아이들은 자라 나에게 나무이름을 묻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아이들의 호기심이 그쳐버린 탓이다. 세상살이에 익숙해지고 하찮은 나무이름쯤은 몰라도 학교 공부에 차질이 없다는 생각을 구축한 것일까? 아이들 육아와 교육 욕심으로 이름을 알고 싶던 나의 동기는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다시 식물의 이름을 알고 싶어졌다. 사계절 모두 다른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진도 찍고 글도 썼더랬다. 아마도 시를 쓰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자연물은 좋은 글감이다. 자연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로 달라 보이면 그 이름을 알고 싶어 진다. 밥 벌어먹고 산다고 땅만 보고 하늘 한 번 못 보는 우리네 삶이다. 그런 우리 삶의 한쪽에서 가지를 한들거리며 생각을 환기해주는 식물을 쳐다보는 것이 삶을 풍성케 한다는 것을 조금 깨닫기 시작했다.


친절한 관리소 직원분의 섬세한 코팅 작업이 빛이 났다.  지나가다 봐도, 승용차 내부에서도 또렷하게 알 수 있는 크기의 글씨였다. 아파트를 돌아 나가려는데 나의 눈에 띄는 명찰이 하나 있었다. 우리 아파트에 가장 많은 개체수를 가진 것인지 출발부터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다. "왕빛나 나무"  한두 그루가 아니었다.


왕빛나 나무라는 이름을 보고 나무의 밑동부터 위로 훑어보았다. 식물도감을 살피는 체질은 아니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왕빛나 나무라는 이름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나무를 다시 올려다봤다. 하늘에서 아침 빛이 쏟아졌다. 부신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이름에 걸맞은 나무의 특징을 찾기는 어려웠다. 괜히 그 잎사귀가 다른 것보다 윤기가 나는 것 같아 보였다. "왜 저 나무를 왕빛나라고 지었을까?" 왕빛나라고 지은 학자가 이 나무를 유독 사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웃었다. 나무를 향한 애정으로 그 이름마저 어여쁘게 지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멈칫멈칫 나무 옆을 느리게 지나다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는데 왼쪽에 큼직한 글씨가 키 큰 나무에 떡 하고 붙어있었다.

왕벚나무 너였어?

"왕벚나무" 조금 전 그 나무와 생긴 것이 비슷한데 이름이 다르나고 생각하다가 머릿속에 빛이 번쩍거렸다. "뭐야, 비슷한 이름이 아니라 내가 잘못 본거야? 너무 아름다운 상상을 하며 콧노래까지 불렀는데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일어났다. "아닐 거야. 왕빛나 나무가 있는지 검색해보면 알잖아"라는 마음과 "어서 돌아가서 확실하게 확인해봐. 분명 잘못 본 거야"라는 마음이 싸웠다. 결국 나는 차를 돌렸다. 다시 지나온 길을 거슬러갔다. 아파트 구석구석 왕빛나 나무는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 왕벚나무였다. 나의 착시때문이었다. 착시가 어여쁜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왕빛나라는 이름으로 나무를 보았을 때 뭔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 보였다. 그 이름을 지은 이유가 궁금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뻔했다. 이름이 예쁘니 나무의 자태도 왕빛나 보였다. 끼어 맞추기식 사고를 했던 것이다. 그냥 나무는 아주 나무다운 자태만 가졌을 뿐 특이점이 없었다. 마음의 눈이 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오늘 착시 현상을 통해 평범한 왕벚나무가 '왕빛나는 내 마음의 나무'로 자리매김했다. 평생 왕벚나무를 잊어버릴 일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나의 시시껄렁한 글 나부랭이를 통해 빛나는 왕벚나무의 존재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다.  


모든 나무가 수수한 모양일지라도 아무렇게나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고심해서 이름이 정할 때 그 이유와 이야기는 분명 존재한다. 아침의 작은 소동으로 한 가지 마음먹은 것이 있다. 익숙하고 사소한 식물의 이름을 통해 상상하고 질문하는 일을 서둘러야겠다고 다짐했다. 겨울이 오면 수분을 머금으려는 나무의 가지는 가녀린 이파리를 다 떨굴 것이다. 다 떨어지기 전에 나무마다의 목소리를 들어야겠다. 실행하기 위해 식물도감을 펼칠 것인가 앱을 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기왕 이렇게 온 김에 하나 더 붙이자면 식물의 이름도 그러한데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이름의 숨은 이야기를 물어본다면 얼마나 더 풍성할까. 시시한 사람이라 여기지 말고 특별한 이름의 주인공이라고 바라본다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 더 두꺼워 지지 않을까?

사소한 모든 것이 사소하지 않다.
제각기 이름이 있듯 숨은 이야기와 이유를 갖고 존재한다.
무엇이든 특별하게 보면 그것은 특별해져서
가슴에 별로 남게 된다는 것

오늘 아침에 하나 더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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