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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Jun 29. 2020

부모들도 모여 아이 뒷담화 해야 쓰겄네.

아이 방문 부수지 말고요

큰아이는 프로자퇴러 2년 차에 접어들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또래의 시간표에 맞추지 않겠다는 결정은 자유시간과 자기 주도 학습의 길을 찾게 해 주었다. 집에서 자퇴 생활을 영위하던 아이는 온 나라가 코로나로 시끌벅적할 때조차 평정심을 유지하며 평소 루틴대로 생활했다. 학교 등교 시기로 우왕좌왕할 때도 아이는 요동없이 원래 듣던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


그렇게 스스로의 시간을 계획하고, 미래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탐색하고 여유시간 게임 영상도 찍으며 매일 자기 스타일을 찾아 하루하루 집을 지었다. 나의 잔소리와 아이의 독립성은 수많은 언쟁과 격한 자기주장을 거쳐 존중과 타협이라는 섬에 도착했다.  


부족해 보이는 결정이 못 미더워 아이의 일상을 침범할 때가 많았지만 초면의 이웃집 청년이라 생각하면, 집착이나 채근을 멈출 수 있다. 타인의 삶에 불쑥 개입하는 게 얼마나 무례한 것인가.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달으니  무례보다는 양해를 구할 때가 많아졌다


주변 학부모들의 전화를 자주 받는다. 사춘기 아이를 둔 학부모의 하소연은, 듣는 것도 힘들고 조언도 힘들다. 집집마다 무거운 돌덩어리 하나 치우지 못한 것처럼 근심 걱정이 즐비해서 듣기 힘들고, 어떤 원칙과 방향을 말해줘도 최악을 겪어야 스스로의 문제를 직면하는 예가 많아 조언하기 힘들다.


나의 사춘기 맘으로의 행보가 눅진한 것처럼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 가슴에 든 멍이 다시 아려오는 것 같다. 그래서 몇 가지 꼭 기억하고 실천하면 좋은 것을 정리해 나눠보려 한다. 순전히 주관적 경험이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의 이론을 참조해 실천해본, 인생 공부의 결과임을 밝힌다.

1> 아이를 내 소유라고 고집하지 말자.

이 고집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이는 반대로 튄다. 강압적 부모, 주장이 센 부모일수록 아이는 반대로 도망갈 수 있다. 사리분별이 안 되는 아이를 돕는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만 존중 없이 손에 쥐고 '내가 원하는 대로' 흔들면 그것은 폭력에 가까운 보살핌 아닐까. 눈에 보이는 억압만 억압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모 생각의 감옥이 아이들을 옥죌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은 부모의 소유의식 때문에 자주 커진다.


이런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앞일은 각오해야 한다. 부모는 자기주장 일색이고 아이를 꺽어 속이 후련하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자녀 인생 중 언제라도 억압의 결과는 민낯을 드러낸다고 한다. 자녀가 평생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며 우울 가운데 보내는 것보다 일찍, 스스로 자신을 직면하고 미래를 준비하게 열어줘야 한다. 자녀를 내 소유, 나의 주장대로 할 수 있다는 고집을 어서 빨리 버리길 권하고 또 권한다. "내가 내 마음대로 시키지도 않아요. 다른 엄마에 비하면 자유를 얼마나 주는데요. 잔소리도 안 해요"라는 부모들이 있는데, 진짜 아이가 말랑말랑한 심성일 때 물어봐야 한다. '엄마가 아이를 얼마나 믿고 맡기는지'. 부모 앞에서 속마음을 쉬 드러내는 아이는 없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자기 의사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학생을 가끔 만난다. '모른다'는 답을 연신하지만,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알 수밖에 없는 존재다.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모른다 보다 차라리 '싫다'가 나은데도 그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린다. 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고 부모가 알아서 채워준 경험이 많아서일까? 어떤 학생은 매우 수줍게 말했다. "엄마는 나보고 선택하라고 하고, 고민해서 선택하면 별로라 그래요. 그럴 거면 왜 물어봐요? 엄마가 모조리 정해주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어 내 아이들에게 엄마는 어땠는지 물어본 것으로 기억한다.

2> 아이의 자립을 존중하자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어릴 때는 세상의 이치를 잘 몰라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부모의 결정을 벗어나거나, 부모가 원치 않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세상 무너지는 줄 알던 아이는 변한다. 변해야 정상이며 성장의 증거다. 몸은 부모처럼 자랐는데 자기 생각을 떳떳이 밝히려니 부모의 경제력을 넘어설 수 없다. 부모의 그늘 아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줄 아는 것이다. 반항을 한다는 것은 부모의 은택을 벗어날 용기를 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생각이 분명 해지지만 다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냈다가 된통 큰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루한 사고방식, 윤리도덕적 틀, 입시를 의식한 학업 강조에 아이들은 견디며 자란다. 겉으로 잘 따른다고 부모와 생각까지 일치하지 않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아이도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 가르쳐 암기시키던 교육은 세뇌에 가깝다. <데미안>은 기존의 윤리 도덕적 틀에서 벗어나는 싱클레어의 성장 이야기다. 모든 아이는 사춘기가 되면 부모와 사회가 만든 알을 깨는 과정을 필히 겪는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면서 자신의 내면에 만들어진 틀, 곧 한 세계를 깨고 날아오르려 몸부림친다. "왜?"라는 질문은 온당한 것이며 "꼭 그 방식 이어야 하냐?"는 반항은 불온하지만 건강한 표지다. 이런 아이의 자립적 사고가 밖으로 표현되면 어른들은 권위의 박탈을 느끼고 아이를 누르려한다. 사춘기 이전에는 아이를 강압으로 누르면 겁먹거나 말을 들었다. 그런데 사춘기 눈빛을 장착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부모는 '나떠나서 살 수 없다'는 생각을 내비칠 때 크게 두 가지 반응을 한다.(세 가지 네 가지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굴욕적이지만 참던지 대범한 비행을 하게 된다. 어떤 반응이든 속으로는 기성세대가 구축한 알껍질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득실거리는 것은 비슷하다.


아이의 생각을 물어야 한다. 아이가 답하면 꼬리를 물고 교훈적 말씀을 꺼내면 안 된다. 아이도 정답을 알지만 못하거나 하지 않는 것인데 굳이 답을 주면 다시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의 대답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면 된다. 선을 넘는 위험한 생각, 불법한 실행 욕구라면 구체적인 상담이 필요하지만, 반항적으로 말한다 해도 속으로 올바른 기준 또한 알고 있다. 아이들도 중요한 원리를 버릴 생각은 없다.


어른들이 올바른 길을 교훈하면 아이들은 반대로 살고 싶어 진다. 들어주고 기다리고, 때론 I표현법으로 의사를 전달하면 아이는 가려들을 줄 안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고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고 싶을 뿐이다. 아이의 생각을 충분히 듣고 끄덕거린 후 해주고 싶은 말은 백만 번이라도 삼키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아이는 5살 꼬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부모가 더 강하게 밀고 들어가면 아이는 방문을 열고 집을 나간다. 자기의 말을 들어주고 통하는 또래나 선배나 후배나 이성에게로. 그 대상이 선량하든 질이 나쁘든 상관없다. 아이가 가출하지 않았고 부모와 대화가 가능하다면 기회가 많다. 묻고, 답하면 끝까지 소중하게 들어주기. 영혼 없는 반응은 금물이다. 끝까지 끝까지, 부모님은 함구하기.


3> 아이가 닫고 열게 방문 열쇠를 주자.

굳게 닫힌 문 너머 아이가 건설적인 미래를 연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부모는 없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가 나쁜 영상에 빠지고, 나쁜 친구들과 채팅하고, 질 낮은 문화를 따라 하고, 이상한 중독에 빠지지나 않을까 문에 귀를 기울여 엿듣게 된다. 아이와 치열하게 싸워 핸드폰은 허용하고 방문은 열기로 합의한다. 믿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고, 아이도 믿지 못하게 약속을 못 지켜 문제다. 


아이가 자기만의 공간, 침범당하지 않고 싶은 마음. 자신의 노래 취향, 영상 선호도, 공부하는 모습까지도 부모에게 노출하는 것을 꺼린다.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들고 싶지만 그러는 모습을 들키는 게 몹시 부끄럽다. 나쁜 영상을 보거나 중독에 빠져서가 아니다. 단지 자신이 무엇인가 몰두한 모습을 가족이 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뿐이다. 행위 자체가 나쁘지 않는데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분위기에, 아이는 목숨을 걸고 문을 닫고 싶어 한다. 혼자 집중하고 싶은데 노려보는 눈이 있다면 어떻게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까. 차라리 방문의 열고 닫음을 아이에게 주고 핸드폰 사용시간을 조율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지인이 아이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는데 방문은 열어두기로 했다고 한다. 당장 아이에게 방문 주도권을 주라고 했다. 아이를 의심하기 전에 아이의 관심에 다가가서 가까워져야 한다. 가까워지고 신뢰하게 되면 문을 닫고 종일 있는 아이를 의심하는 게 줄어든다. 엄마가 모르는 분야라도 아이의 관심사라면 공부해야 한다. "엄마는 구려, 탑골공원 시대야? 나 때는 말야라고 하지 마."라고 아이가 반응해도 괜찮다. 말을 하면 썩 나쁘지는 않다는 말이다. 아이가 말문을 열 때까지 잔소리 금지와 관심 어린 다가섬이 절대적이다. 중간에 비난과 인격비하적 발언은 모든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한다.

4> 부모들끼리 연대해서 아이들을 욕하자

사춘기 아이들은 또래끼리 하나가 되기 쉽다. 부모라는 공통의 적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의 연대는 아주 탄탄하다. 모여서 엄마를 까고 아빠의 치부를 들춘다. 선생님을 비하하고 선배들을 조롱한다. 선을 넘는 아이도 있고 속으로 선을 넘으며 조용히 동참하는 아이들도 있다. 어찌 되었든 아이들은 어른들을 싸잡아 함께 욕한다. 그들의 욕은 노래와 같다. 노래를 들으며 속을 채우고 비우는 것처럼 어른을 씹으며 속을 비우고 채운다. 사실 부모를 씹는 정도는 애교스럽다. 아직 정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부모보다 친구가 더 좋고 가깝기 때문에 가정의 치부, 부모를 향한 비난을 꺼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연대에 비해 부모들의 연대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부모들도 아이들처럼 모여야 한다. 모여서 속 시원하게 비우고 털고 채워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라는 죄책감. 아이의 비행을 말하려니 자신의 치부 같아서 이야기를 못 꺼낸다. 공부 잘하는 자랑은 모르는 사람 앞에도 꺼내는데 사춘기 자식새끼 이야기는 영혼이 통하는 절친에게도 꺼내기 힘들다. 자식은 부모를 비춘다는 의식. 사실 이것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부모를 비추돼, 잘 비추기까지 혼돈의 과정이 있다. 부모의 은덕을 알고 철이 들고 식견이 멀쩡해지기까지 고뇌와 갈등과 싸움, 애증의 과정을 반드시 통과한다. 그리고 사춘기 호르몬이 잠잠해지면 아이의 모습에 부모가 담긴다는 말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힘겨운 과정을 혼자 감내하고 아이의 등교 후 오열하는 학모들이 많다. 숨어있어 다른 집은 다 괜찮아 보일 뿐이다. 나만 이상한 엄마고 아빠라 아이를 망치는 것 같고, 키우는 과정에 무엇을 잘못해서 지금의 결과가 나타난다고 생각하며 한숨 쉰다. 이렇게 숨는 마음을 방치하면 부모마저 병이 든다. 과한 신경증을 나타내며 호르몬 과다로 제정신이 아닌 불안정과 혼란의 극치에 있는 아이가 맞붙어 싸움이 낭자해진다. 그래서 숨으면 안 된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 아이와 맞붙어서는 답이 없다. 40 춘기와 4 춘기의 만난에 아름다운 낭만은 없다.


 모여서 험담을 까야한다. 아이의 일상과 비정상 같은 언행을 만방에 고하라는 것이 아니다. 함께 모여 토로하다 보면 1>에서 말한 아이를 향한 집착과 고집을 서서히 버리게 된다. 아이를 보기 전 책으로 나를 바라보게 된다. 책 내용을 쉐어링을 해도 좋고 함께 글을 쓰면서 안온한 심령이 되는 방법도 있다. 쓴 글을 낭독하면 감출 수 없는 눈물을 쏟아야 한다. 결국 아이와 부모는 독립적 존재로 떨어져야 살 수 있다. 밀접할수록 떨어지는데 출혈이 크다. 아이를 건강하게 독립시키기 위해 모여야 하고, 욕을 욕을 하려다가 자신을 찾게 된다. 아이에게 집착하려던 마음의 뿌리를 찾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놓을 수 있게 된다. 모여서 욕을 하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모여서 욕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성인 글쓰기 모집의 대상을 좁혀 주부에 한정하면 아침시간 공방에 오열함으로 비우고 채우는 엄마들이 많아지겠지. 학부모들이 아이 문제에 득도함으로 마음이 강해지면 아이들을 강제하는 태도도 달라지겠지. 코로나 상황을 지켜보며 오프라인 모음을 결성하는 '사고'를 쳐야겠다. 내 새끼 험담 클럽!! 이거 참 흥미진진하다. 3분기에 과정을 관찰 기록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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