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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물둘에 만났었지?

by 최신애

'뜬금없다'는 표현은 이런데 써야 한다.

오전에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나의 반쪽과의 시간이 불현듯 지나갔다. 찰나의 시간에 담을 수 없는 무수한 장면들. 톡을 보냈다. 뜬금없이 말이다.


"우리가 22살에 만났었지? 동아리 수련회에서? 나는 아직도 당신이 입었던 하얗고 사그락 거리는 소재의 츄리닝바지가 기억나네"

보내기를 누르고 바로 답이 왔다.

"왜 이카노"

"그냥"

"참나......"

"뭔가 울컥하네"

"내 지금 정신없이 바쁘다. 할 일이 천지 널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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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반쪽의 어떤 말도 아프지 않은 경지에 올랐나 보다. 바쁜 저쪽이 안쓰러우면서도 든든하고, 낭만을 깨는 말인데도 따듯하다. 나의 울컥과 그의 버럭이 어찌 보면 같은 일직선 위에 있는 것 같다.


연애가 4년, 짝꿍으로 산 게 19년. 23년의 세월이란 서로 바닥을 보며 견디고 밀어내다가 다시 수용하기의 반복이었다. 과거에는 악순환처럼 느꼈다면 이제 '이해'라는 이름표를 붙일 만큼 성장하지 않았을까? 이런 헤아림이 갑자기 밀려왔다. 어지간해서는 사투리 툭툭 뱉으며 반은 친구요 반은 코치며 반은 적인 것처럼 팽팽했던 세월이었는데.(짝꿍의 생각은 다르겠지.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낸 적이 많다고 하지 않을까? "뭐가 미안해?"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후벼 팔 때가 있었었었더랬지) 허투루 보내지 않은 세월 같아 먹먹함을 느꼈다.

"아침부터 와이캐쌌노?(아침부터 왜 이렇게 어색하게 구는 거니? 오글거려 참을 수가 없구나.) 고마해라(톡을 그만 보낼 의향은 없는 거니?)"


결혼이란 한량없이 넓은 품으로 다른 존재와 균형을 맞춰야 하는 외줄 타기 같다. 혹은 서로 균형을 맞춰 노를 저어야 간신히 전복을 면하는 작은 보트 같다. 한쪽이 기울면 다른 쪽이 용을 쓰고 다른 쪽이 흔들리면 나머지가 꽉 붙들어야 하는 과정인듯하다. 그 길을 20년 세월 이어오다니. 반쪽에게 고맙고 스스로 대견한 아침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슬아슬하지 않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웬만한 일은 오해하지 않을 만큼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니 덜 흔들리는 외줄인 것은 분명하다. 반쪽이 하는 말의 표면보다 속에 숨은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경상도식 의사소통법에 길들여진 것인지 인격도야의 심층부에 닿은 것인지 구분은 안되지만, 꽤 순항하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한 일이다.


*p.s: "고마해라"를 "나도 울컥하네"로 듣는 지병을 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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