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도쿄 긴 교토 (7) - 06.26 / 결국 3차까지...
집에서 뒹굴다가 저녁 시간이 됐습니다. 어제는 방이랑 친해지려고 방에서 저녁을 먹었으니 오늘은 제대로 나가서 먹어봐야죠? 친구가 추천해 준 야키도리집이 카라스마역 근처에 있길래 버스를 타고 나갔습니다.
무슨 일이죠? 오늘은 가는 곳마다 뭔가가 안 풀립니다. 이미 만석이라 입장 불가. 심지어 가게 오픈한 지 10-20분 밖에 안 지났는데... 아무래도 앞으로는 예약을 하고 움직여야 될 것 같네요.
마침 가라스마역의 서북쪽. 예전에 관심을 가지고 찜해둔 지역입니다. 겸사겸사 동네 구경을 해볼까? 하면서 좀 걸었습니다.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은 것이 좀 아쉽습니다만, 관광객이 많지는 않고 고급 맨션이 많이 보이는 지역이더군요.
중간중간 마음에 드는 가게가 하나씩 있기는 했는데 짠 것처럼 모두 수요일 휴무. 정말 어쩔 수 없이 마냥 걸었습니다. 이쪽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저쪽 골목으로 돌았다가 한 2-3km 걸었나 봅니다.
결국 걷기에 지쳤을 때 발견한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테이블이 두 개, 바 좌석이 여섯 개 정도의 작은 가게. 교토 만화 박물관 뒤쪽의 료센이라는 가게입니다. 구글맵에서 찾아보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인 마츠시게 유타카가 방문한 사진도 보이네요.
일단 자리에 앉아서 ‘나마 히토츠’를 주문했는데, 좋은 맥주가 있다면서 추천을 합니다. 우드밀 브루어리 교토의 하사쿠 화이트라는 맥주였어요. 레몬을 사용했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레몬향이 강하진 않았고 깔끔하고 상쾌한 맛이 좋은 밀맥주였습니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오늘의 추천 메뉴가 약 7-8종 있고, 가벼운 안주와 식사류 메뉴가 따로 있었습니다. 와인은 근처의 다른 가게에서 추천해 주는 것으로 직접 가져다주시고요.
근데 이게 메뉴 읽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종이에 프린트한 거라서 잘 번역이 될 줄 알았는데, 폰트 굵기가 너무 굵어서 글자들이 다 뭉개져 있었어요. 그래서 번역기 돌리는데 엄청 낑낑 대면서 ‘새우’가 들어간 요리를 주문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온, 귀여운 모나카! ㅋㅋㅋ
무슨무슨 무스에 새우가 올라가 있고 당근, 애플 민트 같은 것을 무스와 함께 모나카에 싸서 먹는 요리였습니다. 생각했던 것이랑 너무 달라서 놀라긴 했지만, 정말 맛있었어요. 무스의 식감도 좋았고 새우의 고소한 감칠맛도 좋았는데 모나카에 싸 먹는 재미도 있고 애플민트가 상큼하게 마무리해 주고요.
힘들게 해석한 두 번째 메뉴는 안창살 구이입니다. 맛없기가 어렵죠. 구운 정도도 좋았고요(저는 레어 싫어합니다 ㅎㅎ). 보기엔 양이 적어 보이지만 입이 짧은 저에게는 충분한 양이었어요.
고기에 맞춰 와인을 한 잔 주문했습니다. 글라스로 시킬 수 있는 레드 와인이 세 종류 있었는데, 레이블을 보여주거나 품종, 국가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부드러운 맛 / 중간 맛 / 개성 강한 맛의 세 종류. 뭐가 나올까? 기대하면서 개성 강한 맛을 주문했더니 잠시 뒤에 가게 문이 열리면서 다른 가게 사장님(?)이 오셔서 와인을 따라주고 설명해 주십니다. 돗토리의 소공자라는 품종으로 만든 와인입니다. 그르나슈랑 비슷한 뉘앙스의 와인.
마지막으로 주문한 요리는 결국 다시 새우 요리. 이번엔 새우와 야채 튀김입니다. 간장과 칠리를 사용한 소스를 뿌렸네요. 요리에 맞춰 교토의 짓코쿠라는 니혼슈를 주문합니다. 양을 넉넉하게 따라 주시네요.
요리 세 개를 먹고 문득 주방을 보니 화구가 엄청 많아요. 마스터 혼자서 주문에 맞춰 동시에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주십니다. 자체 개발한 메뉴들이 특색 있고 맛도 좋습니다. 참 좋은 이자카야였어요. 그 뭐냐 ‘이자카야’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가게.
안주가 좀 남아서 군마현의 니혼슈도 한 잔 더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계산을 부탁드렸더니 따뜻한 물을 한 잔 주십니다. 아 감동. 계산하는 거 기다리는 동안 따뜻한 물로 속을 달래라는 의미겠죠. 아, 그러고 보니 두 번째 잔을 주문할 때 찬 물도 한 잔 주셨었어요. 첫 잔 마신 입을 물로 씻고 두 번째 잔을 마시란 거잖아요. 필요할 때 알아서 챙겨주는 작은 배려. 감동이 있는 가게입니다.
그리고 계산서를 받았는데, 비싸더군요!! 감동이 있어야 하네! ... 아닌가? 요리 세 개, 술 네 잔. 많이 나오는 게 맞는 거구나 ㅋㅋㅋ
근처에 마침 찜해둔 ‘야마야’라는 주류 판매 가게가 있길래 구경하러 갔습니다. 아니 ‘술’을 구경하러 갔는데 안주 코너가 아주 천국입니다. 특히 오크라 말린 것이 있길래 하나 샀습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데요. 분명히 말린 것인데 씹으면 오크라 특유의 그 끈끈한 물기가 생깁니다. 가츠오로 간을 한 것 같고요. 이거 진짜 물건! 그리고 와인 두 병을 사가지고 지하철을 타고 방으로~
방에 와서 와인을 마시려고 했는데, 화이트 와인이다 보니 칠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와인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건물 2층으로 갑니다, 네, 숙소 건물의 2층에 바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입주민(?)으로서 인사하러 갑니다.
첫 잔은 하이볼. 싼 걸로 해달라고 했더니 올드파 12년으로 만들어 주시네요. 살라미와 생햄을 안주로 주문했습니다.
두 번째 잔은 위스키 추천을 부탁드렸어요. 다 좋아한다고 하니까 당황하시긴 했지만, 뭐 사실이니까요. 백바를 가리키면서 2층에는 많이 보던 병들이 있는데, 3층에 있는 병들은 다 처음 본다고 말씀드렸더니 그중에 한 병을 꺼냅니다. 달유인 8년. 처음 듣는 증류소인데, 어려서 그런지 아주 프루티하고 쉐리오크 숙성이라 마시기 편합니다. 저는 글렌드로냑 15년이 떠올랐어요. 첫인상이 아주 좋은 위스키.
사진은 찍지 않은, 엔젤스 엔비를 또 한 잔 마셨습니다. 일본에 작년부터 수입된 버번이라더군요. 한국엔 아직. 저에겐... 집에 한 병~ ㅋㅋ 맛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레드 와인 한 잔. 이태리의 수수마니엘로라는 품종입니다. 처음 듣고 마셔 본 품종인데 꽤 끈적한 와인입니다.
자, 다시 방으로 올라와서 칠링 해둔 와인을 꺼냅니다. 이것저것 안주를 꺼내서 술을 마시다가 잠들었어요. 그리고 오늘은... 사망~ ㅋㅋ 뭐 어때요. 어차피 내일도 할 일은 없는데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