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해맞이 여행 - [4부] 유유자적 구마모토
주말 내내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가고시마 여행 사진 정리하고 브런치 포스팅하는 등 집에 틀어 박혀 대충 밥 차려 먹으면서 쉬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젯밤에는 결국 집에 쟁여둔 술과 안주들을 꺼내서 혼자 마시기 시작했고, 늦은 시간까지 마시고 또 마셨죠. ㅎㅎ 사진이 몇 장 있긴 한데, 뭐 좁은 집에서 남자 혼자 술 마신 사진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아서 굳이 포스팅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 포스팅 목록을 보니 1월 11일, 12일, 13일 해서 포스팅을 여덟 개나 올렸네요. 가고시마에서 찍은 사진이 엄청 많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집에서 사진 정리하고 포스팅만 계속했나 봅니다.
1월 13일 월요일.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날이지만 일본에서는 공휴일이었습니다. 매년 새해 두 번째 월요일은 ‘성년의 날’이라고 하더군요. 두 번째 ‘월요일’인 게 재밌습니다. 무조건 토일월 연휴가 되는 거잖아요.
어쨌든 성년의 날도 큰 공휴일인가? 이 날 번화가에 나가면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갓 성년이 된 남녀들을 볼 수 있는 건가? 하는 기대감도 좀 있긴 했지만, 어제 밤늦은 시간까지 마셨던 탓에 만사 귀찮아져서 그냥 집에서 뒹굴었습니다. 아, 바로 집 앞에서 큰 길만 건너면 되는 야마모토야라는 식당에 잠깐 저녁을 먹으러 나가긴 했는데요. 15~17일까지 3일 동안 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더군요.
그래서 편의점으로 갔습니다. 술이 덜 깼는지 속도 별로 안 좋아서 돈지루(돼지고기 국)를 하나 사고, 소세지를 사이드로 샀습니다. 그냥 즉석 미소국으로는 해장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뜨끈한 돈지루라면 속이 좀 풀릴 것 같았어요.
저녁을 먹고,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오후 9시 19분 즈음 됐을 때 갑자기 핸드폰에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당황스러울 만큼 큰 소리.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보니 긴급재난문자가 왔습니다.
긴급 지진 속보 : 강한 흔들림에 대비하십시오. 침착하게 주위의 안전한 장소를 찾으십시오. (일본 기상청)
일본에서 지진을 겪는 것이 처음은 아닌데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어요. 긴급재난문자를 받아 본 것도 처음이고, 혼자인 상황도 처음입니다. 게다가 이 집은 호텔 같은 숙박시설도 아니기 때문에 어디 상황을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에요.
너무 당황스러운데 곧이어 정말 꽤 큰 흔들림이 옵니다. 한 2-30초 정도 지속했다고 기억해요. 솔직히 말해서 패닉이었습니다.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구에게도 지금 이 상황을 물어볼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지진이 지나간 다음 ‘이제는 괜찮은 건가?’하는 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지금’ 괜찮은 건지 ‘언제까지’ 조심해야 하는 건지... 도대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 때문에 패닉이 되더라고요.
창문을 열어 다른 집의 상황을 살피는데, 정말이지 조용하기만 합니다. 다들 집 안에서 뭔가 대비를 하고 있는 걸까? 아, 그래 티비를 틀어보자! 예전에도 구마모토의 어떤 바에서 술을 마시던 도중에 지진이 온 적이 있고, 직후에 바로 티비를 틀어 진도가 얼만지 맞추기 내기를 하던 모습이 기억났어요. 제 기억에 당시의 진도는 3.2 정도. 하지만 티비에는 자세한 지진 정보는 없고 큐슈에 지진이 있다는 정도의 자막만 나오더라고요.
도대체 나는 지금 대피를 해야 하는 건지 그냥 지내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약한 패닉 상태였어요. 뭔가 정보가 더 필요했습니다.
아! 기상청! 어쨌든 인터넷에도 뭔가가 올라오겠지!!
일본 기상청 홈페이지에 갔더니 티비 자막과 비슷한 수준의 정보밖에 없었고요. 야후 재팬에서 지진으로 검색해 보니 야후 재팬의 재해 정보 서비스가 있더군요. 지금도 가서 보면 아주 약한 지진까지 모든 정보를 누적 기록하고 있습니다.
https://typhoon.yahoo.co.jp/weather/jp/earthquake/
이곳에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었어요. 미야자키현 앞바다가 진앙이고, 미야자키는 진도 5 정도. 구마모토는 진도 4 정도의 지진이었더군요.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까 정보는 더 자세해졌어요. 그리고 이후에 진도 2-3 정도의 여진이 새벽까지 이어졌습니다.
솔직히 제대로 잠을 못 잤어요. 자려고 누우면 또 흔들. 야후 켜보니까 지진. 다시 누우니까 또 흔들. 야후 켜보니까 지진이 아니네. 그럼 그냥 침대 출렁인 건가. 또 흔들. 지진. 또 흔들. 아니네. 침대는 계속 출렁출렁(싸구려 매트리스였거든요). 이 출렁임이 지진인지 아닌지도 모르는채 어쨌거나 흔들리는 침대에서 밤새 뒤척였습니다.
다음 날, 한국에서 연락이 왔고, 좀 더 심각했었구나, 그리고 괜찮다는 발표도 있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앞으로 3-40년 내에 일본에 대지진이 한 번 올 거라는 얘기를 저도 들었던 적이 있는데요, 오늘의 그 지진이 전조인가? 하는 뉴스들이 한국에도 쏟아졌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동생이 걱정된다면서 연락했습니다. 괜찮다고 안심시켜 주긴 했지만 저도 궁금해서 뉴스를 좀 찾아봤죠.
지진 이후 바로 조사(?)를 시작했고, 제 기억이 맞으면 오후 11시 즈음에 대지진의 전조는 아니다. 관계없다. 상황 종료. 라는 발표를 했다고 하더군요.
며칠 뒤 미조마타 상과 선배님과 셋이서 술 마실 때 이날의 얘기를 했더니 그냥 일상이라면서 아무 일도 없다고 괜찮다고 하던데... 사실 저는 그런 대답을 며칠 전에 듣고 싶었어요 ㅠㅜ
이 지진 이후 며칠간 싸구려 매트리스가 출렁일 때마다 그 패닉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지진 자체가 무섭다기보다는 혼자라는 게, 어디에도 무엇도 물어볼 수가 없다는 게 무서웠어요. 약하지만 트라우마처럼 남아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한 게, 재난문자가 지진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건데요. 진앙이 먼 경우에는 이렇게 먼저 알려줄 수도 있나 봅니다.
뭐 그래도, 여행은 계속됩니다. 다음 포스팅은 좀 더 재밌는 얘기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