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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

27. 나쓰메 소세키의 집, 구마모토 아재들과의 밤.

2025 새해맞이 여행 - [4부] 유유자적 구마모토

by zzoos



오늘은 드디어 토요일입니다. 지난주에 만나려다가 독감에 걸려서 만나지 못했던 미조마타 상을 만나기로 한 날이네요.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기 위해 라인을 주고받았습니다. 오늘은 오카야마(岡山)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에서 유학한 선배도 구마모토의 본가에 들르는 날이라서 함께 만날 수 있다고 하네요. 지난번에 엄청 얻어먹었으니 오늘은 제가 사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금을 잔뜩 준비해 둬야겠네요. 아무래도 가게에서는 현금을 좋아하니까, 카드와 현금을 같이 내밀면 현금을 집게 된단 말이죠.


약속은 저녁이니까, 낮에는 무얼 할까요?


오늘은 가까운 산책도 할 겸, 점심도 먹을 겸 외출을 해봐야겠습니다. 목적지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저택. 숙소에서 멀지 않아서 부담 없이 산책할 수 있을 거리입니다.





숙소에서 저택까지는 작은 골목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걸어서 10분? 15분 정도?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구석구석 풍경이 예쁘게 눈에 들어옵니다.





일본 최초의 근대 문학가이자, 일본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 뭐, 저는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어쨌든 도쿄 출신인 그가 소설을 쓰기 전, 구마모토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 살던 집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그 고등학교가 지난번 구마모토 대학 교정을 산책할 때 봤던, 바로 그 제5 고등학교입니다. 입장료는 200엔.





구마모토에서 약 4년 정도 지내는 동안 총 6 군데의 집에서 살았다고 하는데요. 그중에서 상시 방문이 가능한 곳이 바로 이곳, 다섯 번째 집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저택'이네요.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도 몇 군데 있습니다. 안내해 주시는 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시기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들고 와서 인증샷을 찍거나 앉아서 한참을 읽고 가는 한국인들도 많이 있다고 하시네요.





저택의 일부분은 양식으로 지었습니다. 화식(일본식)과 양식이 섞여 있는 정말 저택이네요. 둘러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의 대저택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선생이 살기에는 아주 큰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 둘러보고 나올 때 안내 할아버지께 '집이 아주 크고 멋진데요. 당시에는 고등학교 교사가 이렇게 좋은 집에 사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나요?'라고 여쭤보았습니다. 지금과는 생활상이 다를지도 모르잖아요. 고등학교 교사가 지금의 대학 교수처럼 선망받는 직업일지도 모르고 말이죠.


안내 할아버지는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아주 좋은 집이고, 나쓰메 소세키가 구마모토에서 살았던 여섯 개의 집 중에서 가장 크고 좋은 집이라고. 여기서 딸이 태어나기도 했다고 하네요. 물론 당시 고등학교 교사에게 이 집은 과분한 집이었지만, 바로 앞의 집에서 살 때 부인에게 마음의 병이 생겨 요양을 위해 무리해서 좋은 집을 구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저택에서 나와 점심을 어디서 먹을까 잠깐 고민을 했는데요. 아까 저택으로 걸어올 때 봤던 작은 간판들이 기억났습니다. 당장 카레가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작은 골목 안에 숨어 있는 가게가 궁금해서 들어가 봤죠.


그랬더니 분위기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오늘 점심은 카레를 먹기로 했습니다. 닭, 돼지, 소 등의 고기는 부담스러워서 그냥 야채 카레를 주문했어요. 조명 때문에 사진이 좀 별로인데, 저 카레 진짜 맛있었습니다.


숨어 있는 집을 찾아낸 것 같은 즐거움, 작은 강변에 나무로 만든 오래된 집의 좋은 분위기, 맛있는 카레와 친절한 직원들. 이 가게는 추천할만한 곳이네요. 이름은 Bond curry입니다. 일단 제가 방문했을 때는 워크인으로 입장이 가능했어요. 예약까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이 가게 옆의 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솥밥을 하는 가게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저녁에만 영업을 하는데, 거기도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못 가보고 귀국했네요. 이름은 긴난카마메시(銀杏釜めし). 다음에 구마모토 방문하면 꼭 가봐야지 싶어요.





점심 먹고 집에 와서 사진 정리라거나 브런치 포스팅 등의 작업을 좀 했어요. 그리고 드디어 저녁 약속 시간이 되었습니다. 번화가까지 걸어가는 길목에 하치만구(藤崎八旛宮)가 있기 때문에 거의 매일 보게 됩니다.





약속 장소는 이자카야 타케나가(たけなが)입니다. 미조마타 상이 지난번에 추천해 주셔서 저도 한 번 방문하려고 했으나 만석이라 포기했던 가게. 오늘은 미조마타 상이 예약을 해두셨다고 하네요.


7시 약속인데 6시 50분에 도착했습니다. 가게 밖에서 한참을 망설였어요. 미조마타 상이 예약했는데 내가 먼저 들어가도 되나? 들어가서 뭐라고 말해야 되는 거지? 등등 소심한 A형, 숫기 없는 I인 저는 창문으로 안쪽을 들여다보면서 언제 들어가야 할지 고민했어요. 결국 7시가 되어서야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일행은 아직 아무도 안 왔고, 미조마타 상이 3명 예약했을 거라고 얘기했더니 자리를 안내해 주시더군요.


잠시 후 미조마타 상과 츠노다 상이 오셨습니다. 미조마타 상은 3주 전에 ICOCA라는 바에서 옆자리에 앉게 되어 알게 된 일본 아저씨입니다. 바에서 만나고는 바로 그 주 토요일에 다시 만나서 엄청 얻어먹었죠. 츠노다 상은 바로 그 토요일에 전화 통화를 했던 일본 아저씨입니다. 미조마타 상의 선배이고 지금은 오카야마에서 일하고 계신다네요. 오늘은 구마모토 본가에 들르신 거고요. 두 분 모두 반도체 엔지니어라고 합니다.





셋이서 모두 자리에 앉으니 타케나가의 명물, 전갱이 이케즈쿠리(活け造り)가 인당 한 접시씩 바로 나오네요. 이것도 미리 예약해 두셨다고 하더라고요. 일본의 사시미는 숙성회잖아요? 하지만 이케즈쿠리는 활어회를 말합니다. 게다가 회를 뜨고 남은 몸통을 같이 장식하는 것을 말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생선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타케나가에는 수조가 있고, 그 안에 전갱이가 헤엄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횟집처럼 말이죠.





활어회가 흔하지 않기도 하고 일본 사람들은 전갱이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메뉴가 이 집 명물이 된 이유는 생맥주 한 잔과 전갱이 이케즈쿠리 한 접시가 단 돈 980엔! 바로 이 저렴한 가격입니다. 맥주 한 잔 마신다고 생각하면 신선하고 맛있는 사시미까지 나오는 거죠! 게다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회가 전갱이 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집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저렴하고 맛있는 집!





다음으로 뭘 먹을지 한참을 토론하다가 결국 주문한 것은 스키야키 2인분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2인분이에요. 겨우 5,000엔!! (1인분에 2,500엔) 셋이서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의 양이었는데, 심지어 맛도 좋더군요. 냉동 고기라 조금 걱정했지만 걱정을 확 날릴 만큼 맛있었어요. 야채가 신선하기도 하고 푸짐하기도 했고요.



잘은 모르지만 한국 유튜브나 블로그 어딘가에 이 가게가 소개된 적이 있나 봅니다. 그래서 이 가게를 찾는 한국 사람들은 모두!!! 스키야키를 주문한다고 하네요. 사장님이 저한테 뭐 아는 거 있냐고 하시길래, 전혀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ㅎㅎ


정말로 스키야키는 '다 같이' 먹을 때 즐거운 음식이더군요. 간사이풍인지 간토풍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저씨 셋이서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먹으니까 맛도 좋고 푸짐해서 즐거워지는 그런 음식이었습니다.


스키야키를 다 먹어갈 때 즈음, 아까 먹은 전갱이의 뼈를 튀겨주셨습니다. 물론 추가 주문을 해야 하는 메뉴라고 합니다. 겨우 980엔에 이것까지 바라는 건 무리겠죠.



미리 스포(?)하자면, 결국 이자카야 타케나가에는 저 혼자 다시 한번 술 마시러 와서 전갱이 이케즈쿠리를 또 먹고, 야키도리도 먹고, 다른 요리도 먹게 됩니다. 끝내주는 맛집은 아닐지 몰라도 친절한 사장님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재밌고 친절한 단골손님들이 있으니, 아주 마음에 드는 가게가 아닐 수 없네요!





2차로 찾은 곳은 모나리자노하하에미(モナリザのほほえみ)라는 바입니다. 번역하면 모나리자의 미소 정도가 되겠네요. 다들 줄여서 그냥 모나리자라고 부르더군요.


분위기가 아주 좋은 곳입니다. 밝고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 잘은 모르지만 구마모토의 아저씨들에게 힙한 곳인 것 같습니다. 마스터(?)가 아주 미인이십니다.


'바'로서의 특징을 굳이 찾자면 교토의 진을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도 추천받은 진을 로꾸로 한 잔 마셨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굳이 비싸게 마셔야 할 이유를 잘 못 찾아서, 그냥 가쿠 하이볼을 마시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다는 걸 얘기해서 그랬던 걸까요? 12시 즈음되니까 타케나가의 사장님도 오셨습니다. 가게에서 유니폼(?)을 입고 계시던 것과 사복의 분위기는 완전 다르더군요. 확실히 구마모토는 '패션'의 도시입니다. 사장님도 멋쟁이였어요.


여기도 문 닫을 시간이 되어 3차로 이동합니다. 3차는 지난번에도 갔었던, 미조마타 상의 동창이 운영하는 바인 모니카(バー モニカ). 오늘은 무서운(?) 동창 언니가 없었어요. ㅎㅎ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언니와 함께 닷소와 므기소다(보리 쇼츄 + 소다수)를 마셨죠.





3차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새벽 3시가 넘어서야 헤어졌습니다. 오늘은 꼭! 내가 쏘겠다고 각오하고 나갔는데, 결국 모조리 다 얻어먹어버렸거든요. 손님이 계산하게 할 수 없다면서 형님 두 분이 모두 쏘셨어요. ㅠㅜ 게다가 츠노다 상은 오카야마의 오미야게(お土産)를 잔뜩 주셨습니다. 쿠키, 지자케(地酒), 지비루(地ビール). 저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ㅠㅜ 다음에 구마모토에 올 때, 아니 미조마타 상이나 츠노다 상이 한국에 오면!!! 제가 반드시 대접하겠다고, 두 번 세 번 약속을 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무도 없는 상점가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패밀리마트에 들렀더니 평소에 먹던 라멘이 없어서 처음 보는 라멘을 사서 집에 돌아와 한 그릇 후루룩~ 하고는 잠이 들었습니다.


지난 월요일의 지진 이후, 너무 조용하면 잠이 잘 안 와서, 유튜브를 틀어두고 잠을 청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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