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쓸모에 대해
사람을 나누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정리를 기준으로 나누어본다면, 잘 버리는 사람과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방 안을 슥 둘러보니, 몇 평 되지 않는 작은 방 안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진 물건들이 가득 들어차있다. 그렇다. 나는 잘 버리지 못하는 쪽에 속한 사람이다.
이사를 할 때마다 몇 년 간 사용하지 않았거나 쓸모를 다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몇 번의 이사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방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주로 이런 것들이다. 이제껏 주고받은 다정한 편지들,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던 날에 보러 다녔던 전시 팜플랫들, 영화 티켓들, 이런저런 기념일이나 내가 생각이 나서 샀다며 건네받은 책들, 나와 잘 어울린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옷가지 같은 것들.
추억이 한가득인 이것들을, 나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부둥켜안고 있겠지.
이런 내가 할머니가 된다면, 아마 이런 할머니가 돼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보았던 그림책이 있다. 레미 할머니의 서랍이라는 그림책.
레미 할머니는 작은 물건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고, 꼭 알맞은 쓸모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고운 하늘색 서랍에 간직해 놓는 사람이다.
이 서랍 안에 보관되어 있는 물건들은, 저마다 자기가 언제 새로운 쓸모로 다시 쓰일까를 손꼽아 기다린다. 과일맛 사탕을 담은 병이었던 것이 어느 날 레미 할머니가 만든 맛있는 딸기잼을 담은 딸기잼병으로 다시 태어나고, 설탕병이었던 길쭉한 유리병은 여름채소로 만든 피클을 담은 피클병이 되기도 한다. 그 와중에, 초콜릿을 담았던 작은 초콜릿 상자는 다른 것들은 자꾸만 새로운 것으로 다시 쓰이고 있는데 자신만 새로운 쓰임으로 다시 쓰이지 못할까 봐 내내 노심초사.
서랍 속에 들어있던 여러 물건들이 총동원되어 아주 보기 좋은 새로운 것들로 선보이는 날인 장날에도, 작은 초콜릿 상자는 쓰임 받지 못했고, 홀로 쓸쓸히 텅 빈 서랍장에서 울고 있는데… 어느 낯선 할아버지의 손이 작은 초콜릿 상자를 집어 올린다.
레미 할머니에게 고백하기 위해 직접 만든 반지를 넣기 위해.
그렇게 작은 초콜릿 상자는 근사한 반지 상자가 되었다.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버리기 힘들어하는, 추억을 힘으로 삼고 사는 내가, 그런 사람에 머물러 있기보다 레미 할머니처럼 새로운 쓸모로, 새로운 어떤 것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생각하며 이 그림책을 읽었다.
다들 각자의 쓸모에 맞게 새로운 시작을 하는데, 자기만 오래도록 쓰임 받지 못하던 작은 초콜릿 상자가 결국 반지 상자로 다시 쓰임 받았던 것처럼, 도통 알 수 없는 앞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자신이 점점 초라하게 여겨지는 나날들을 지나고 있을지라도, 나를 잘 지키며 가꾸다 보면 다시 알맞게 쓰일 수 있다는 용기도 듬뿍 얻을 수 있었다.
추억을 부둥켜안고 사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늙어가야 하는지 어떤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은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쾌쾌하게 먼지가 쌓인 추억들을 꺼내 잘 털고 다듬어서, 나와 다른 이들에게 따듯함이 되고 유용히 쓰임 받는 필요가 되기를…
이 글을 써 내려가면서, 나에게서 다른 이들에게로 자꾸만 시선을 돌리는 습관을 길러야겠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알맞은 쓸모가 되면 참 좋겠다고 자꾸만 되내었다. 정말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레미 할머니의 서랍 감상 tip
- 내가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추억이 있는지 생각해 보기. 그 추억을 소중한 이들과 나누어보기.
- 그저 방치해두고 있는 물건들이 있다면, 새로운 쓸모를 찾아주거나 기부하기.
- 비교가 아니라 나의 장점, 다른 이들의 장점을 보는 습관 기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