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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Apr 15. 2018

나를 대접하는 시간

페루 찬차마요 Peru Decaff Chanchamayo G1

저 멀리 치악산 자락 신림면에 살고 계신 A의 어머니 ,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하셨다 . 어제 학원이 끝나자 마자 병실로 가 다른 식구들과 교대를 하고 저녁을 먹고 밤 9시가 되어 간이침대에 누웠다 . 2시간꼴로 간호사들의 방문이 이어졌고 , 심야에도 검사를 이어가는 병실 내 환자들덕에 잠들지 못한 밤이 참 길게 느껴졌다 . 그렇게 몽롱한 상태로 날은 밝았고 어머니의 이른 아침 식사가 끝나자 마자 병실을 떠나 학원으로 향했다 . 꾀죄죄한 몰골로 몇 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도착중인 752번 버스 . 도도도 달려 마지막으로 탑승해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찰나 A에게 메세지를 받았다 . " 지금 어머니랑 점심마치고 퇴원 해 집에 가고 있어 "  .  


A가 말하는 " 집 " 이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 우리집 > 이다 . 앞으로 열흘간 시어머니는 우리집에서 요양하신다 . 더군다나 위 수술을 하셨기에 앞으로 3일간 초극강의 연식도 필요했다 . 그렇게 효부놀이 돌입 !




부랴부랴 집에 도착 해 A와 다시 크로스 , 나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주방으로 향했다 . 미음과 죽의 바탕이 될 재료들 다듬고 , 대량의 쌀을 손으로 으깨 익히고 , 소고기 좍좍 찢어 연한 장조림 만들고 , 맑은 애호박 찌개 끓이고 ,  반찬들 만들고 , 내일 드실 장국도 우려내면서 갈치까지 굽고 나니 벌써 오후 6시 . " 어머니 , 식사 하세요 " 하며 밥을 차려드리는 도중 , 친척 어르신들이 갑자기 병문안을 오고 계시다며 근처 지하철 역에서 전화를 주셨다 . 찾아오는 법을 알려드리고 마중나가 모셔왔다 . 당연히 저녁은 드시지 않았기에 마침 끓이던 장국으로 잔치국수를 만들어드렸다 . 다행히 어제 A가 가져온 과일도 있어 커피와 같이 내어드리며 잠깐 어르신들의 말 벗 해드리고 배웅도 마치고 , 설겆이까지 끝내고 나니 이윽고 10시 . 시어머니도 곤히 잠드셨다 . 드디어 집에 온 지 8시간만에 의자에 앉아 고요함을 마주한 나 . 최근 금전활동으로 바쁜 A는 한 집에 살고 있으나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 왜죠 ? 갑자기 울엄마가 보고 싶네 . 엄마아 ㅠ -- , 어제부터 이어진 긴-하루 . 어쨋든 잘 끝낸 것 같은데 , 이 찝찝함은 무엇일까 ?! 띠로리 ~ 띠로리로리리 .


!!!!!!!  아 .., 나 오늘 커피 한 잔 도 못마셨어  !!!!!!!




테이크아웃커피 , 인스턴트 커피 한 모금 조차 떠올리지 못 할 만큼 효부놀이는 상당히 상당하다 굉장히 굉장해 엄청나게 엄청난 하루였다 . 월컴투더시월드 ! 라기엔 평생 중 고작 열흘 뿐이니까 마음을 다잡고 나에게 커피를 대접하기로 했다 . 평소같으면 이른 아침 조용한 식탁에 앉아 오늘 마실 커피의 품종과 음악을 선곡하는 재미로 일과를 시작하는데 , 어제 병원에서 잤으니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잊을만큼 긴장했나보다 . 애정하는 음료이자 좋아하는 커피가 오늘따라 더욱 다른 의미로 손을 내민다 . ' 나를 대접하기 위한 커피 ' 로 .


- 찬차마요 원두콩과 추출도구들 -


나는 기꺼이 , 한 잔의 커피를 위해 세계 곳곳의 다양한 생두를 고집스럽게도 집에서 직접 볶는다 . 볶은원두는 핸드드립 , 푸어오버 , 프레스 , 모카포트 , 사이폰 , 워터드립 , 더치 , 콜드브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추출한다 . 수행자처럼 정성어린 동작과 맛있어지라는 주문을 외우며 자신의 방법으로 완성한 커피의 첫 모금을 만끽하기 위해 카페인 중독자들은 수고로운 일상을 즐긴다 .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 나 ' 를 대접한다는 목표 혹은 기분을 깨닫고 커피를 완성하는 건 뜻밖에도 처음이라 너무 생경해 마음 한 켠이 간질간질 했다 . 밤 11시를 달려가고 있으므로 안전한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기로 결정 , 기왕 마시는 거 왕사발로 드링킹하고자 공방에서 특별주문한 컵과 받침을 꺼내본다 . 추출도구는 킨토의 슬로우커피로 정했다 .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느긋함이니까 . 메탈 필터에 미세망점이 뿅뿅 뚫려 미분도 추출되지만 역시 농후한 맛(=바디)을 선사하는 도구다 .


오늘의 원두는 페루 ( Peru ) 찬차마요 ( Chanchamayo ) 디카페인 커피 . 2010년 카페쇼에서 페루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 마추픽추에서 달려온 듯 전통의상을 입고 " 짠짜마요~ 굳~ 굳~ " 을 외치며 내게 시음을 권하던 아저씨덕에 첫 인연을 맺게 된 원두다 . 더불어 아름다운 커피 <안데스의 선물>도 좋아했기에 ( 페루의 생두들로 구성된 커피 ) 페루 아저씨가 자긍심으로 소개하던 찬차마요의 커피 - 그 풍성한 향과 구수한 맛 - 에 마음을 뺏길 수 밖에 없었다 . 이따금 건강 문제로 카페인 섭취가 곤란할 경우를 대비해 디카페인 커피를 준비하고 있는데 , 최근 찬차마요 디카페인을 구매했다 . 건강하게 잘 생긴 이 원두는 경쾌하다 싶을 정도의 약한 산미를 가지고 있으며 구수한 느낌이 좋은 커피다 . 몇 모금 마시고 나면 혀 끝에 단맛도 슬며시 생겨 왕사발에 한 가득 담고 나니 부자가 된 기분 ! 아끼지말고 꿀떡꿀떡 마셔야지 .




멋진 음악과 책처럼 한 잔의 커피로도 삶에 위안을 얻는다 . 인생이 바뀌었다는 친구도 있다 . 수 없이 많은 커피를 내렸지만 “ 나에게 대접하는 커피 ” 를 마주하자 숙연해진다 . 또 울엄마가 보고싶네 . 크흙 엄마아 -,

이제 몇일 안 남았다 . 시어머니께서 거동이 불편하신 건 아니라 참 다행이다 . 계시는 동안 좀 더 노력 해야지 , 잘 해드려야지 . 서로 다른 세상과 가치관 속에 살아왔으니 맞지 않는것까지 맞추려 애쓰기보단 , 별 의미 없는 단어에 휘둘려져 스트레스 받기보단 , 커피 한 모금처럼 흘려 보낼 수 있는 깊이와 내공이 생기길 바랄 뿐 .


♪ 새소년 - 나는 새롭게 떠오른 외로움을 봐요 https://youtu.be/-WREqIdLiRE


- 500ml 의 커피를 품고있는 내사랑 왕컵 -


글/사진 ㅣJumi Kim https://brunch.co.kr/@zzu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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