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픔은 네잎클로버를 닮았다
암 진단 후 지난 1년 동안 유독 네잎클로버 선물을 많이 받았다. 그만큼 나에게 행운이 필요하단 거겠지. 퇴원하고 병원 서류를 정리하면서 수술기록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기록지에는 수술로 제거한 암 덩어리 사진이 있었다. 암의 형상은 보면 볼수록 낯설기만 했다. 그 어색함이 강한 탓인지 징그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사진에는 암 덩어리 밑에 암 크기를 측정하는 자가 함께 찍혀 있었다. 실제 암 크기는 1.3cm인데 사진이 확대되어 대략 7cm로 보였다. 나는 내 몸에 있던 암을 볼 수 없었고, 수술 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수술이 잘 되었어요. 암은 잘 제거되었습니다.”라는 통보를 통해 결과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1.3cm의 암은 걱정할 만큼 위험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암 진단 후 지난 1년 동안 나의 마음은 7cm 혹은 7cm 이상의 암과 싸우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암은 cm로 검사가 가능하지만 마음의 짐은 어떤 크기로도 측정이 되지 않는다. 제거된 암 덩어리의 사진을 아무리 쳐다봐도 이것이 정말 내 몸에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런 감각, 감정,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형태만이 눈에 들어왔다. 암의 모양은 우글쭈글하게 제멋대로 자란 나뭇잎처럼 보였다. 완벽한 4개의 잎으로 나눠지진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암세포는 네잎클로버를 닮은 듯했다. 최근에 네잎클로버 선물을 많이 받다 보니 암마저도 비슷하게 보이는 걸까? 암 덩어리가 왜 행운의 상징으로 보이는 것일까? 암이 어떻게 행운을 가져다줄 수 있단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암이 행운이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 몸에 암이 생긴 것, 암 환자가 되어버린 상황을 불운보다는 행운 쪽에 두기로 했다. 나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보기로 선택했다.
퇴원 전 의사 선생님의 마지막 회진이 있던 날, 나는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그래서 저는 왜 암이 걸린 건가요?”나는 암에 대한 가족력도 없고, 돌연변이 유전자도 아니고, 건강한 식습관에 운동도 자주 하기 때문에 암에 걸린 진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의사 선생님의 입으로부터 확실한 원인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의사 선생님께서는“그냥 운이 나빴던 것뿐이에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몸 전체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한동안 누워서 병실 창문만 바라봤다. 암에 걸린 진짜 이유같은 건 없었다. 그저 나의 불행한 운명. 나의 불운을 논하기에 지친다면 종교라도 가져야 하나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현재 상황이 나아진다면 종교에 마음을 기대보려고 했다. 나의 조카는 어릴 때부터 엄마를 모신 사찰이나 좋은 풍경 앞에서 나름 진지하게 절을 올리고 기도를 했다. 그러면서 조카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하늘나라에 있는 할머니에게 기도를 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할머니에게 무엇을 그리 간곡히 비는지, 조카에게는 만난 적도 없는 할머니가 그 어떤 신이나 종교보다도 의지할 만한 대상이었나 보다. 애도에 깊이 빠져있었던 시기에 나는 주로 혼잣말처럼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그것이 기도였는지, 수다였는지는 알 수 없다. 바램과 체념이 뒤섞인,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무의미한 대화였다. 아무에게도 내 마음을 말할 수 없을 때, 마음속으로 엄마에게 한탄하고, 응석도 부리면서 그때의 상황을 헤쳐나갔다. 의사 선생님의 대답을 듣고 왜 그때의 시기가 떠올랐을까. 불운의 대상이 된 상황에서 내 마음을 엄마에게 털어놓으며 다시 말을 건네고 싶었던 것 같다. 계속 말을 하면서 나의 불운을 퇴색시키고, 내 운을 새롭게 정립하고 싶었다.
암 진단을 받게 되면 자동적으로 과거의 내 행적을 돌아보게 된다. 과거의 내가 인생의 경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암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과거의 다른 선택을 한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서로의 선택이 맞았다고 주장할까? 아니면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게 될까? 만약의 경우 속에 내 모습은 너무 다르고,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나는 남들과의 비교보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더 많이 비교하는 듯하다. 비교는 현재의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교를 쉽게 그만둘 수가 없다. 어쩌면 나에게 암은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비교를 멈추고 나만의 방식을 수용하고 가꾸며 살아가라는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생겼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암의 유형, 기수, 형태, 건강 상태에 따라 치료방법도 모두 다르므로 암을 비교하거나 암 환자끼리 비교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암 진단 전과 후의 나를 더 이상 비교하지 않고, 내 몸에 생긴 암의 유형을 잘 알아가는 것, 내 몸 상태에 따른 치료 방법에 집중하는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을 잘 알고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간다. 암으로부터 살아가는 방식을 새로 배운다.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일인 것 같다.
지난 1년 동안 내 곁에서 나를 생각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마음 깊이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암을 진단받았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 나에게 연락한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 다양한 위로의 방식들. 그중에서 나는 어떤 위로에 마음이 동했을까. 나에게 맞는 위로는 무엇이었나.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준 사람. 과일과 책을 보내준 사람. 영양보충식을 보내준 사람. 커피와 차를 보내준 사람. 나를 만나러 병원에 여러 번 와준 사람. 회복할 때 맛있는 것 먹으라고 돈을 보태준 사람. 바람 쐬고 싶을 때 언제든 연락하라던 사람. 손 편지를 써준 사람. 나 대신 씩씩거리며 세상과 신에게 화를 내준 사람. 평소처럼 위로를 받았던 방식이 있는가 하면 평소 같으면 위로라고 생각지 않았던 방식이 암 환자가 된 상황 속에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동하기도 했다. 암은 나에게 여러 가지 위로의 방식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머리가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보면 기쁘다. 한 가닥마다 두피에서 솟아나는 모습이 귀엽고 기특하기까지 하다. 머리카락을 자라나게 하는 내 몸에 고마움이 절로 생긴다. 그동안 두피를 보호하는 머리카락의 존재가 너무 당연했다.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을 잃어본 후에야 살아가기 위해 알맞은 상태를 자동적으로 만들어주는 내 몸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는다. 암에 걸리지 않았으면, 항암 치료를 하지 않았으면 이 사실을 절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호르몬 약을 복용한지 6개월이 지났고, 암의 완치를 판정받는 5년까지는 앞으로 4년이 더 남았다. 치료 단계에서 부작용을 염두에 두며 지내야 하고, 부작용으로 인한 몸의 변화를 주시해야 한다. 암 경험자는 완치 이후에도 안심할 수 없다. 마음 한편에 항상 재발의 가능성을 두고 꾸준히 건강을 챙겨야 한다. 암 환자가 되고 나니 양가의 감정이 생겨났다. 사소한 일상생활부터 챙기자는 마음과 지금까지 안 해본 일들을 하나씩 하면서 매일 하루를 새롭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부딪친다. 정말 읽어야 할 책들만 남기고 다른 책들은 다 정리하자는 마음과 이 세상 모든 책들을 다양하게 읽어보자는 마음이 대립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명소를 가보자는 마음과 동네에 있는 소소한 장소 정도만 유유히 다니자는 마음이 동시에 든다. 욕심 없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감사하자는 마음과 아프더라도 한 번 사는 인생에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 보자는 마음이 충돌한다. 양가적인 마음은 혼란을 부른다. 마음이 제멋대로 자기주장을 펼친다. 마음속 불순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정말 중요한 것만 남게 된다. 암은 나에게 ‘하고 싶다. 되고 싶다.’와 같은 욕망을 하나둘씩 제거하게 해주었다. 이것은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다. 단순한 마음. 단순한 생각. 단순한 일상. 단순한 삶. 더 단순하고 더 가벼워 지려고 한다. 불안과 싸우고 불안을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위태로웠던 내가 긍정적인 감정을 차곡차곡 채우는 노력을 해나간다. 언젠가는 내 불운이 행운을 넘어서 행복에 다다를 것이다. 내 암 덩어리가 네잎클로버처럼 보인 순간부터 나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천천히 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