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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머핀 May 25. 2024

익숙한 불행에서 벗어나기

나의 삶을 바꾼 태도 #9

오래 전인 2003년, 고등학교 1학년 일 때 있었던 일이다. 그때 학교 끝나고 다니던 입시학원에서 진경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나와는 다른 호탕한 성격을 가진 쿨한 친구여서 꽤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진경이가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미 알고 지낸 시간이 길고, 마침 그때가 설날이 지난 직후였기에 나에게 세뱃돈으로 받은 7만 원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20년 전이고 게다가 난 학생이었으니 꽤 큰돈이었지만, 크게 쓸 일이 없었기에 진경이에게 나중에 돈이 생기면 갚으라며 흔쾌히 빌려주었다.


그때는 5만 원권도 없었던 시대였으니, 7만 원은 큰돈이었다.


그렇게 6개월이 다 지나가도록 친구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기한?을 설정하지 않은 나의 잘못도 있지만, 나는 슬슬 돈을 못 받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두 번 언제 갚을 수 있겠냐고 (심지어 상냥하게) 물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좋지 않다는 답만 들었다. 형편이 어려워서 그러려나 잠깐 떠올려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어느 날 참다 참다 나는 이제는 갚아달라는 이야기를 용기 내어했다. 그때에도 그 친구는 "지갑을 잃어버려서 지금은 돈이 없다"는 이야기를 반복했지만, 나도 이제는 필요하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밀어붙였다. 그렇게 세 번을 독촉했더니 그제야 낡은 봉투에 만 원짜리를 대충 접어서 건네받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사과는 당연히 없었다.  


그런 대접을 받았더라면 나도 인연을 이어가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때의 나는 그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애써 사이좋게 지냈다. 새로운 친구를 다시 만들자니 다른 누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것만 빼면 다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미 익숙한 관계인데 내가 좀 불편한 것만 참으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사람은 '낯선 행복'과 '익숙한 불행'이 있다면, 익숙한 불행을 훨씬 더 많이 선택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행복이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있고, 남이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도 나에게는 어제오늘의 일이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살아가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는 이런 익숙한 불행을 택하는 방식이 유독 사람과의 관계에서 많이 나타났던 것 같다. 즉,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도 좀처럼 거리를 두지 못했다. 어릴 적 내가 선택을 내리는 방식은 나의 행복과 불행, 진짜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고려하기보다, 먼저 그 선택이 나에게 익숙한지를 많이 따졌던 것 같다.  


이렇게 익숙함이 선택 방식으로 자리 잡으면 불행조차 내 손으로 걷어찰 수 없게 된다. 이런 경험은 아마 다들 있을 것 같다. '저 친구랑 사이가 나빠지면 나하고는 아무도 안 놀아줄 것 같은' 불안감에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거리를 두지 못하는. 또는 연애를 하거나 직장을 다닐 때도, 저 사람 아니면, 또는 이 직장 아니면 나를 사랑해 줄, 고용해 줄 사람은 앞으로 없을 것 같은 불안.  


물론 낯선 무엇 앞에서는 일단 거부감이 든다. 음식 중에서도 새로운 맛은 일단 별로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지만 처음에는 뭐 이런 맛이 다 있을까 싶은 음식 몇 번 먹어보면 중독될 정도로 맛있는 음식도 많다. (나에게는 마라탕이 그랬음ㅎㅎ)


몇 년 전부터 나의 최애 음식이 돼버린 마라탕 ㅋ


간혹 다른 사람이 건네는 새로운 관점이나 의견도 그렇다. 처음에는 거부반응이 나온다. 제대로 생각해 보기 전에 무의식에서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 하고 넘긴다. 내 딴에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 대충 생각나는 이유를 들이대고 거부를 한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저 이전에 접하지 못한 낯선 무엇인 경우가 많다.  


낯선 행복을 잘 알아볼 수 있으려면 일단 그 환경에 노출이 되어 보는 수밖에 없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고 오히려 훨씬 더 좋을 수 있다. 그렇게 몇 번 새로운 것을 익숙하게 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더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 아마 고등학생일 때에도 그 친구 없이 그냥 혼자 지내 보았다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하고 그런 친구쯤 가볍게 손절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이것을 깨달은 지금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진짜로 나를 도와줄/돕지 않을 것들을 구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니 다행이다. 그러니 새로운 것이 찾아오면 잘 생각해 보자. 내가 이것이 진짜 싫어서 거부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가 봐도 좋은 방법인데 단지 나에게 새로워서 하지 않으려 한 것인지. 낯선 행복에 익숙해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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