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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01. 2017

루브르 박물관의 숨은 보물

예술사-아비뇽 피에타가 보여주는 모정

어비뇽 피에타. 루브르 박물관 소장.


세계에서 많이 알려진 내노라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가면 일단 그 규모와 작품수의 방대함으로 대체 뭘 봐야할지 몰라 아예 처음부터 지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제법 설명서와 안내지도를 펼치고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도 나중엔 시간에 쫒기고 힘도 부쳐 그냥 스치며 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친절하게도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은 유명한 작품들을 카탈로그에 표시해 넣어 어느 방에 있는지 가리켜 주며 또 박물관 내부 곳곳에다 방향표시도 해놓아 찾기 쉽도록 도와준다(다른 큰 미술관도 비슷하다). 말인즉, 바쁘고 미술에 관심이 별로인 관광객을 위해 이런 유명 걸작품들만은 꼭 봐야한다고 친절하게 표시해 놓은 것이다. 누가 루브르에 갔다가 ‘모나리자’를 못 봤다고 한다면 좀 이상할 것이고 대영 박물관(British Museum)에 갔다가 ‘로제타 스톤’이나 ‘파르테논 신전’의 일부 조각품을 놓치면 가보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루브르에선,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든가 미켈란젤로의 ‘노예’ 그리고 로댕의 작품들도 이런 바쁜(?) 사람들을 위해 방향 표시를 잘 해두고 있다. 하지만 이 센느 강변의 박물관은 소장품이 워낙 방대해 시대별, 나라별, 대륙별 구분에 맞춰 따라 가다보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관람객들로 항상 북적대기에, 특히 이런 대작들 앞에서는, 마음놓고 감상하기 어렵다. 여기까지 와서 저 작품을 못보고 가면 안되지 하는 마음으로 꼭 챙겨 보도록하는데 많은 작품들은 사실 그냥 훓고 지나는 때가 많다. 한번은 루브르에서 이런 복잡해진 머리와 지친 다리를 쉬려고 구석진 벤치를 찾다가 외진 조그만 방 거의 한 면을 채운 중세의 ‘피에타’ 그림을 발견했다. 작품의 크기에 비해 작은 방에 걸려있어 약간 먼 발치에서 보아야 함에도 이 그림이 비추는 신비한 빛에 금방 감염될수밖에 없었다.


‘아비뇽의 피에타(The Pietà of Villeneuve-lès-Avignon)’라 불리는 이 피에타 그림은 ‘앙그랑 꾸어통(Enguerrand Quarton 또는 Charonton. 1410 – 1466)’이란 15세기 프랑스 화가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이 15세기 프랑스 화가가 진짜 그렸는지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 다만 이 화가의 생애와 몇점 남아있지 않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얻은 결론이다. 다른이들은 이 그림이 포르투갈 또는 스페인 카탈란 지방의 작품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종종 비교되는 이 화가의 ‘성모님의 대관식(The Coronation of the Virgin)’이란 작품은 이 피에타만큼이나 유명하다. 하지만 작품의 깊이로 보자면 이 아비뇽의 피에타가 개인적으론 훨씬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 그림은 비예너브 레 아비뇽(Villeneuve-lès-Avignon)이란 타운의 갈멜 수도원에 걸려있어서 작품명이 ‘아비뇽 피에타’로 불리게 되었다. 이 곳은 중세때 바티칸을 떠나 교황청을 옮긴 프랑스 남부 아비뇽의 론(the Rhône) 강 바로 곁에 있다.


화가가 활동한 15세기에는 ‘피에타(Pieta)’란 주제로 많은 그림과 조각을 제작했는데 피에타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은 시신을 그의 어머니인 성모님이 끌어 안으며 자식을 잃은 모정의 ‘비통’한 심정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오른편, 차단된 유리 너머에 전시된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도 같은 주제의 작품이다. 이 그림의 뒷 배경엔 아무것도 없다. 4명의 인물들 위쪽 반 뒤편은 황금색으로 칠해져 15세기임에도 중세의 전통을 따랐음을 알수있고 아직 비잔틴 교회미술의 영향이 그대로 볼 수 있다. 배경의 금색은 영원의 상징, 천상의 상징이다. 그래서 그리스 정교회 성인들의 이콘(Icon)에서 뒷 배경을 항상 이 금색으로 입혔다. 또다른 중세의 증거는 이 배경에다 작고 둥근 연장으로 정교하게 찍어 판 각 성인들 얼굴 주위를 감싸는 후광(halo)과 거기에 성인 이름을 새긴 글자들이다. 그림 중심 위쪽의 성모님과 왼쪽의 성 요한 그리고 오른쪽의 성 마리아 막달레나의 후광은 둥근 후광이지만 중앙 수평선 그리스도의 후광만은 선으로 빛이 나오는 듯 표현해 놓았다. 맨 왼쪽에 이 그림의 후원자(Donor)인 성직자(Jean de Montagnac?)가 백색의 제의를 입고 무릅을 꿇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자세히 성인들의 얼굴들을 살펴보면 아직 사실적인 묘사보다 고딕풍의 묘사가 보이지만 이 후원자의 얼굴과 입은 제의는 네들란드(플레미쉬) 풍의 사실적이고 3D 입체적 표현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 그림이 그 전과 다르다면 이 후원자가 사이즈가 본 그림의 성인들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그림전에는 대게 후원자를 본 그림의 오른쪽이나 왼쪽 아래 모퉁이에 작은 크기로 그려넣었는데 이 그림은 후원자를 대등하게 본 그림안의 성인들과 같이 그렸다.


이것뿐만 아니라 이 그림은 전통적 의미의 피에타 주제에 독특한 해석을 덧붙일 수 있도록 그렸다. 특히 중심부의 아들인 예수님의 활처럼 늘어진 몸을 무릎 위에 두고 성모가 두손을 모아 슬픔을 삭이며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다. 보통 피에타에서 그녀의 두 손은 죽은 아들의 몸을 안고 떠받치고 있는데 여기선 다르다. 그림의 왼편 예수님의 머리맡에 요한 복음서의 저자인 성 요한이 긴 머리와 온순한 얼굴을 한 젊은이로 나오며 그의 왼손이 둥근 후광대신에 빛이 나오는 그리스도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자세히보면 그는 오른손으로 스승인 예수의 면류관(가시관)을 빼내고 있다. 한편 요한 복음사가는 그의 신학적 주제인 ‘그리스도의 빛(Christ is the Light)’을 형상화한듯한 후광(halo)사이로 그의 두 손이 들어가 있다. 반대편의 성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녀의 특징인 긴머리에 자신의 죄를 용서한 예수님의 죽음을 보며 눈물을 닦고 있다. 화려한 붉은 색채의 드레스로 보아 성서에 나오듯 그녀의 사연많은 과거를 말하는 듯하며 그리스도의 죽음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회한의 눈물을 닦고 있다고도 할수있다. 또 성서에 충실해 그녀가 오일 병(the vase of ointment. 죽은이의 몸에 바르는 전통)을 쥐고 있는 것은 그대로 그리스도교 회화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중심은 십자가에 내려져 축 쳐진 모습으로 있는 수평의 그리스도을 중심으로 또다른 중심축인 수직적으로 묘사된, 슬프지만 그 아픔을 내면으로 승화시키는듯한 강한 모정의 성모이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얼굴(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의도적으로 표현된 아주 젊은 성모를 비교해 보라)에 부동의 자세로 두손을 모으며 격한 감정을 뛰어넘은 경건한 모습을 잘 표현했다. 그녀의 드레스는 천상의 색이자 성모의 색으로 상징되는 푸른색으로 얼굴부터 발까지 감싸고 속에는 흰 베일을 드러내고있다. 여기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성모의 모습이 이후의 회화에선 자식을 잃은 ‘극한 슬픔(Extreme Sadness)’으로 표현되고 묘사된다는 것이다. 이는 북유럽 독일 신학의 영향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도 비슷하다. 마티아스 그룬발트(Grunewald)의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 1515)에서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예수의 극한 고통의 표현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성모님은 ‘성모자 상(Madonna and Child)’ 성화들처럼 어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후일 십자가의 고통을 상징화하기 위해 어떤 르네상스 성모자상은 아기 예수가 십자가를 들고 있다.)을 상기 비교시킨다.


하여튼, 이 그림에서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중심은 성모이다.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없었을 때 이 어머니는 신앙을 굳게 지키며 아들의 곁에 있었다. 자식떠날 모정이 어디있을까? 그래서 이 그림에서의 성모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죽은 아들 예수의 상처를 응시하며 여기에서 부활과 세상의 구원이 일어남을 묵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극한 고통과 슬픔의 감정적 모습보다 조용히 운명에 순응하며 때를 기다리는 정제되고 경건한 신앙인의 징표로 비쳐진다. 이는 밀라노 성 암브로시오의 신학적 영향으로 십자가의 죽음없인 부활이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을 이 그림에서도 읽을 수 있다. 고통이 없으면 치유의 환희도 있을 수 없다. 이 위대한 모정은 신앙으로 이걸 꿰뚫어 아시고 경건한 모습으로 두손을 모으며 구원의 신비를 죽은 아들을 통해 묵상하며 이에 순종의 자세를 오롯이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피에타 그림에서 또 다른 재미있는 부분은 그림의 왼편 중앙에 묘사된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이다. 이 두 도시는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작고 멀게 보인다. 하지만 건축물의 윤곽으로 보아 왼편의 도시가 콘스탄티노플이란 사실을 금방 알수 있는데 그것은 이 도시에 있는, 유명한 유스티누스 황제가 지은,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당의 윤곽을 뚜렷이 볼수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터키의 이스탄불이라 불리는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인 하기아 소피아는 원래 성당으로 지어졌지만 정치적 부침으로 모스크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1453년에 이슬람이 주 종교인 오토만 터키(the Ottomans)에 점령당한 뒤 지금까지 터키의 가장 큰 도시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 이슬람 모스크 건축의 일부인 ‘미나렛’도 뚜렷이 보인다. 그리스도교인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한때는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등과 더불어 중요한 그리스도교 도시였던 이곳이 이슬람 지배하에 들어간데 대해 은연중 옛 향수를 자극한다.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이 콘스탄티노플이 오토만 제국에 정복된 지 몇년 후에 그려졌다고 하는데 상징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도시와 땅을 잃은 애처로운(lament) 심정을 자식을 잃은 ‘피에타’의 성모님과 비교하며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다시피 극한 슬픔의 고통을 내면으로 승화시키는 성모의 모습에서 화가는 이 역사적 도시를 잃은 유럽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십자가의 고통처럼 부활을 위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그 십자가뒤에 오는 희망의 부활을 위해 참고 인내하는 피에타의 모정처럼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라고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처럼 정치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센시티브한 시기에 이 그림은 어떻게 그리스도교인이 가져야 할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 피에타의 모정처럼 고통을 내면적으로 승화시키며 십자가의 신앙을 다시 되뇌이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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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Pietà of Villeneuve-lès-Avignon'. Enguerrand Quarton. Oil on wood, 163cm x 219cm. Musée du 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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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피에타' 중앙부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쿠바의 트리니다드 성당의 피에타
Lüthy, Oscar Wilhelm
Semantic Undercurrent (Avignon Pieta Transcription), 마이클 니담(Michael Needham) 작.
솜씨없는 사진을 찍었지만 빛 때문에 잘 나오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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