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꽃 이야기
제가 좋아하는 능소화입니다.
옛날에는 무척 귀한 꽃이었지요.
저는 이 꽃을 보려고 일부러 집에서 먼 한벽루가 있는 전주천까지 언니를 따라가곤 했었습니다.
언니는 빨래하러 간다는 핑계로, 나는 언니를 따라 멱을 감으로 가는 것이었고,
엄마에게 말하기는 한별 땅으로 멱을 감으러 간다고 했지만 실은 이 귀한 꽃을 보러 갔었습니다.
우리 집이 있던 남노송동에서 한별땅(당시 우리는 전주천을 한별 땅이라고 불렀다)까지 가는 길은 철길을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굴다리를 지나 오목대를 지나면 큰 기와집이 있는 향교가 나옵니다.
그 향교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지요.
한여름 은행나무를 감싸고 올라가 은행잎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피어있던 꽃!
그 꽃을 처음 본 순간 나는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뭔지 모르게 슬픔이 비누 거품처럼 밀려와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 고작 8살에 불과했었으니, 제가 무척 조숙했었던가 봅니다.
그 꽃이 바로 능소화였다는 걸 아주 오랜 뒷날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동백꽃처럼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지는 꽃,
그로부터 하 많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물론 저는 까마득히 능소화를 잊고 살았지요. 그러다가 종로구 운니동 (구) 덕성여대 건물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고종의 생가이며, 흥선대원군의 저택 일부였던 곳으로 곳곳에 기이한 괴석이며 품격 있는 나무며 화초들이 요소요소에 심겨 있었습니다.
덕성여대 지금은 평생교육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양관 앞에 삼 층짜리 석탑이 있고, 은행나무 고목을 타고 올라간 나이가 든 능소화가 있었습니다.
아침저녁, 짬짬이 그곳을 서성거리면서 행복했었습니다.
능소화, 물론 그때에도 나는 그 꽃 이름이 능소화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전영화 교수님이 은사이신 월전 장우성 선생님을 모시고 미술관에 오셨고 제가 교정을 안내하던 중에 능소화 앞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며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고 말하였지요.
그랬더니 월전 선생님 말씀,
"아하, 능소화! 나도 이 선생처럼 이 꽃을 무척 좋아해 우리 미술관에도 몇 그루 심어놓았지요."
그제야 나는 이 멋지고 애잔한 꽃 이름이 능소화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능소화!
꽃 이름까지도 아름답더군요.
중국이 원산지인 능소화(凌宵花)는 쌍떡잎식물 통화식물목 능소화과의 낙엽성 덩굴식물로 학명은 Chinese trumpet creeper입니다.
능소화를 금등화(金藤花), 기생화, 능화라고도 부르는데,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양반집 정원에만 심을 수 있었고, 일반 상민이 자신의 집에 이 꽃을 심으면 관가에서 잡아다 곤장을 때리고 심은 꽃은 뽑아버리고 두 번 다시 심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여, 양반 꽃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꽃은 7∼9월에 피고 가지 끝에 원추 꽃차례를 이루며 5∼15개가 달리는데, 꽃의 지름은 6∼8cm이고, 색은 귤색인데, 안쪽은 주황색입니다. 꽃받침은 길이가 3cm이고 5개로 갈라지며, 갈라진 조각은 바소 모양이고 끝이 뾰족하며, 화관은 깔때기와 비슷한 종 모양입니다.
나팔 모양의 주황, 홍 황색으로 여름 내내 피고 개화 기간이 매우 길고 꿀도 많아 양봉 농가에서 좋아하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술은 4개 중 2개가 길고, 암술은 1개인데, 열매는 삭과이고 네모지며 2개로 갈라지고 10월에 익는데, 중부 지방 이남의 절에서 심어 왔으며 관상용으로 심었습니다.
한여름 담장이나 나무를 감고 올라가 크고 탐스러운 꽃들을 활짝 피우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아름다운 꽃에 전설이 없을 수 없겠지요. 더군다나 이렇듯 어여쁘고 고귀한 능소화에 말입니다.
능소화를 구중궁궐의 꽃이라고 부르는데 그 전설을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아득한 옛날 복숭앗빛같이 흰가 하면 붉고 붉은가 하면 흰 화사한 피부에 자태까지 더없이 고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은 숨어있어도 드러나고, 더없이 그윽한 향기는 천 리에 퍼지듯 이 소화도 그러했습니다.
어느 날, 이 어여쁜 소화는 임금의 눈에 띄었지요.
임금님과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고, 그 결과 소화의 신분은 "빈"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신분에 걸맞게 궁궐 안에 따로 처소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렇게 딱 한 번 소화에게 다녀간 임금은 그 이후로 빈의 처소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소화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임금님이 너무나도 그리웠지만, 소화는 속으로만 애를 태워야 헸었습니다.
차마 임금님에게 보고 싶다는 뜻도 전하지 못하고, 변변한 측근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빈이 된 소화는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갔습니다.
드넓은 궁궐에 임금의 처첩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서로 간의 시샘과 질투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으니, 가엾은 소화는 이리 밀리고 저리 떠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음모를 알 리 없는 소화는 하릴없이 이제나저제나 하며 임금님이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혹여, 임금님이 자신의 처소 가까이 왔다가 돌아가시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담장 옆을 서성이며 그립고 그리운 임금님의 발소리를 기다렸습니다.
지나가는 임금님의 그림자라도 바라볼 요량으로 담장 너머를 바라보며 하루하루 임금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덧없는 세월과 더불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소화는 임을 그리던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권세를 누렸던 빈이었다면 초상도 거창 했겠지요, 하지만 까마득히 잊힌 구중궁궐의 초라한 왕의 여인이었던 소화는 변변히 초상도 치르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화의 간절한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죽거든 절대 잊지 말고 나를 담장 가에 묻어줘, 혹시 내일이라도 임금님이 나를 찾아오실 줄 모르잖아."
그녀를 모시던 시녀들은 몹시 슬퍼하며 소화를 담장 가에 묻어주었습니다.
이듬해, 더운 여름이 시작되었지요. 온갖 벌과 나비들이 꽃을 찾아 모여들었답니다. 물론 소화가 묻힌 구중궁궐에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소화가 묻힌 그 담장 위로 주홍빛 어여쁜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 꽃은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내다보려는 듯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그것도 모자라 임금님의 발소리를 들으려는 듯 두 귀를 쫑긋 세운 듯 꽃잎을 활짝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 꽃이 바로 능소화입니다
덩굴로 크는 탐스럽고 아름다운 꽃이었지요.
그렇게 피어난 능소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은 담장을 휘감고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활짝 열린 꽃잎의 모습은 정말 귀를 활짝 열어 놓은 듯하였습니다.
그럼 그 후로 소화가 그렇게도 그리던,
죽어서도 차마 잊지 못하던 임금님은 소화를 찾았을까요?
아쉽게도 그러한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참으로 무심하고 무정한 임이 분명합니다.
내내 기다리다 지는 순간에도 기품을 잊지 않고 시든 모습이 아닌 꽃송이째 뚝 뚝 떨어지는 능소화!
기다림의 화신이 되어버린 능소화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임금님 외에 그 누구도 자신의 몸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혹여 누군가 능소화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꽃을 따거나, 떨어진 꽃을 줍기만 해도 능소화의 충이 눈에 들어가 실명할 줄 모른다는 말에 소화의 한이 깊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능소화 꽃가루의 모양이 성게처럼 뾰족뾰족해서 눈에 들어가면 실명까지 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인데, 꽃가루를 확인해 본 결과 동그란 풍선 모양이라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어 더욱 매력이 있듯이 도도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능소화에게는 독이 있다는 엄포까지 놓으면서 이 꽃을 사랑하고 아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여름 어디선가 아름다운 능소화를 만나면 절대 잊지 마세요.
능소화는 오로지 멀리서 눈으로만 바라보며 감상해야 한다는 걸…. 그것이 능소화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예의일 테니까요.
능소화의 꽃말은 '그리움', '기다림'입니다.
https://youtu.be/4gvGl4k9W-Q?si=g_6GGWnZkZ9qb5f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