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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피면 그리운 사람들이 보고 싶다

가야의 꽃 이야기 /

by 가야

능소화가 피는 계절이 돌아왔다.

해마다 능소화가 필 때면 심한 가슴앓이를 한다.


처음 능소화에 대한 글을 쓴 뒤 가슴앓이에서 벗어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능소화에 대한 빚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모든 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어머니가 한 말이 생각난다.


어머니의 고달픈 삶은 결혼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삶이 너무 힘겨웠던 엄마가 어느 날 외삼촌과 함께 당시 전주에서 제일 유명한 무속인을 찾아가셨다. 그 무속인이 엄마를 흘겨보며 한 말


"전생에 선녀였네, 쯧쯧 근데 무슨 지랄병으로 꽃 모가지를 댕강댕강 잘랐다냐?"

무속인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전생에 엄마는 하늘나라 선녀로 부러울 것 없이 살았는데, 하늘 정원 가득 피어있는 꽃 중에서 꽃봉오리만 골라 똑똑 끊어버리고 놀았단다.


지금 엄마가 이생에서 고생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무참하게 꺾어버린 꽃에 대한 벌이라고….


엄마는 그 말을 믿는 눈치였다. 자신의 삶이 힘들 때마다 혼잣말처럼 되뇌셨다.


"무슨 지랄병으로 꽃 모가지를 댕강댕강 끊었을꼬…."


어린 나는 엄마의 한숨 섞인 그 말에서 은연중 꽃에 대한 경외심을 키웠는지 모른다. 엄마의 그 말이 아니었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냥 꽃이 좋았다.

참 많은 꿈을 꾸었는데, 내 꿈은 꽃 꿈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꽃이 가득한 들판에 있었다. 꽃은 다양하고 시야가 미치는 곳은 온통 꽃 천지였다.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이 있고 아름다운 꽃이 있는 그곳.


나는 그런 꿈이 좋았다. 꿈에서 깨면 너무나 아쉬웠고 할 수만 있다면 꿈으로 회귀하여 그 속에 영원히 살고 싶었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꽃이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꿈에서 보았던 수많은 꽃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능소화 이야기를 하다 왜 갑작스럽게 꿈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언니 따라 전주천에 빨래하러 가면서 전주 향교 돌담 위에서 능소화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운니동 운현궁 양관 앞 정원 돌탑 옆 은행나무에 핀 능소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능소화가 다 지고 없어질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능소화 밑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나처럼 능소화를 사랑했던 사람이 또 있었다. 여성 국극단 단원으로 이름을 떨쳤던 김효순 명창이다.


능소화를 사랑한 나머지 집 앞에 심어놓고 능소화 꽃이 필 때면 그 앞을 떠나지 않던 그 고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부분 귀한 꽃이 기르기 힘든 것과 정반대로 능소화는 삽목도 잘 되고 아무 곳에서나 잘 자란다. 이런 능소화가 양반들만 심을 수 있는 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키울 수 없는 꽃이었기 때문에 서민들은 능소화에 대한 갈망이 컸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우리 화단에 능소화를 심었었다. 그런데 너무 잘 자라는 능소화 때문에 다른 식물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능소화를 캐내야 했다.

위 사진이 바로 그때 능소화 모습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능소화가 아파트 곳곳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능소화가 흔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씁쓸하면서도 귀한 대접을 받던 능소화가 천대를 받는 것 같아 서운한 감정도 없지 않다.

능소화를 볼 때마다 소화의 슬픈 전설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진다.

단 한 번 임금님과

사랑을 나눈 소화


그러나

무심한 임은

그녀를 찾지 않았다.

행여 님의 그림자라도 볼까

담장 너머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리다

시름시름 앓던 소화는 숨을 거둔다.


죽어가면서도 차마 잊을 수 없었던 임

소화는 유언대로 자신의 처소 담 밑에 묻혔고 꽃이 되었다.


그 꽃이 바로 능소화이다.

오늘도 소화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임을 기다린다.


죽어서도 멈추지 않는 임을 향한 사랑

사랑

허망함


능소화가 피고 질 때마다

내 가슴엔 살얼음이 서걱댄다..

혹시

전생의 나는 소화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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