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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장 알바 이야기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

by 기록습관쟁이

당구장 알바는 내 인생 첫 사회생활이었다. 그 안엔 시대의 냄새와, 아버지의 땀, 그리고 내 사춘기가 미묘하게 꼬여 있었다.


중학생 때였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아버지가 당구장을 차리셨다. 평소 당구를 좋아하던 것도 아니었다. '왜 하필 당구장이지?'라는 물음표를 삼키기도 전에, 아버지는 지인이 운영하던 당구장을 인수하셨다. 옆엔 택시 회사, 바로 뒤엔 공장단지. "여기다!" 싶은 입지 조건이었겠지. 게다가 그 시절엔 당구장이 꽤 잘 나가고 있었으니까.


지금이야 PC방, VR방, 심지어 무인 멍 때리기 방까지 별별 게 다 있지만, 그땐 그런 게 없었다. 스타크래프트가 갓 태어난 시절, 당구는 그나마 몸 좀 움직이는 놀이문화였다. 당구의 당 자도 모른 채, 나는 아버지 덕분에 당구를 배웠다. 근데 문제는, 세상이 당구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봤다는 거다.


요즘에서야 '정통 스포츠' 대우를 받지만, 그땐 불량 청소년 전용 문화센터였달까. 주 고객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어른들, 택시기사, 건달 느낌이 슬쩍 나는 아재들. 게다가 실내 흡연이 가능하던 시절. 담배를 피우러 오는 건지 당구를 치러 오는 건지 모를 정도로 날마다 연기가 자욱했다.


주말마다 당구장에 가면 담배빵 자국 정리하는 게 제일 싫었다. 당구대에 깔린 천에 시꺼멓게 그을린 흔적들. 당구대 하나에 가격이 얼만데, 왜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당구를 치는 건지 원... 그러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당구장 일을 돕게 됐다. 주중엔 학교를 가야 하니, 주말만. 특히 일요일은 내가 영업을 시작한 날이 많았다. 나름 '주니어 점장'이었던 셈이다.


당구장 오픈 루틴은 이랬다. 먼저 모든 창문을 열고 환기시킨다. 그다음 당구대를 하나하나 닦는다. 당구공도 닦는다. 바닥도 닦는다. 먼지도 닦고... 거의 닦기의 달인이었다. 당구공을 손으로 닦을 땐 왠지 내 인생까지 맨질맨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기분 탓이었다)


'당구장 아들'이라는 타이틀은 학교에도 퍼졌다. 친구들이 주말마다 놀러 왔다. 도와주는 건 핑계였고, 결국 다 같이 당구만 쳤다. 재능 있는 친구들은 어지간한 손님도 이겼다. 근데 이상하게 나는 흥미가 안 생겼다. 억지로 해서 그런지 실력도 늘지 않았다. 열정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쩌면 그때 당구에 빠졌다면 지금쯤 나는 쿠드롱 옆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상상 속 이야기다)


그 시절은 사춘기라는 태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변성기, 여드름, 남성호르몬 폭발. 중2병의 교과서. 여자한테 말도 못 걸던 내가, 당구장에 놀러 온 친구의 여자친구 앞에서는 괜히 당구공 하나 더 닦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공부와 담을 쌓고, 당구대 위에 시간을 쌓았다. 그래도 신기하게 공부할 애들은 다 하더라. 나는 아니었지만... 당구장은 한동안 잘 됐다. 아버지도 웃었고, 나도 택시로 출퇴근했다. 그러던 어느 날, IMF가 터졌다. 진짜 나라가 망하나 싶었다. 당구장도 휘청했다. 택시 대신 버스, 버스비 대신 회수권. 손에 쥔 종이 티켓이, 이상하게 인생 같았다. 찍을 땐 가볍지만, 모으면 묵직하니까.


장사가 안 되자 아버지는 카드 손님도 받기 시작했다. 당구장 한쪽 구석에 포커 테이블을 따로 마련했다. 그리고는... 어느 날 경찰서에 다녀오셨다. 불법 도박은 아니라고 했지만, 뭐...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벌어놓은 돈을 대부분 까먹고, 당구장은 헐값에 넘기셨다. 조금만 더 빨리 정리했다면 손해를 덜 봤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결국 인생은 다 결과론적이니까.

나는 그때 알았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 그건 진짜다.


누군가가 잘되는 업장을 넘긴다고 하면, 일단 의심부터 해보자. 우리 아버지께 당구장을 넘긴 그 사장님은... 분명 선견지명이 있었을 거다. 아마 그분은 돈을 많이 벌었을 거다. 우리 아버지는 돈을 벌... 려다 망한 거고.


나는 당구장 알바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사업은 타이밍이고 흐름이다. 그걸 읽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사업가의 자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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