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날처럼 듣고 있었다

by 영영

먼저 들린 건,

딱,

딱,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 아래 네가 서 있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나는 조금 늦게 그 소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마 밑에 고인 물이

하나씩 깨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방울은 아래로만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귀로도 스며드는 거였다

빗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데서 울리고 있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이

차라리 다정하게 느껴졌다

너무 많은 말보다

그저 들리는 소리 하나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 같았다


걷기 시작한 뒤

발걸음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처음 듣는 소리가 났다

신발 끄는 소리

물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

가끔은 작은 튐과 파열음


그 틈 사이로

예전의 소리들이 흘러들어왔다


편의점 앞

우산이 없던 그날

우리 둘 다 말없이 비를 맞았고

나는

내 어깨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소매 끝이 젖는 소리

피부 위를 기어가는 물의 무게

그건 놀랍도록 조용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선명했다


가랑비는

젖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종류의 소리였고

우리는 그때

이미 많이 젖어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소매 끝이 젖는 걸 모르고

네 손등이 내 손에 스치는 걸

말이 아닌 촉감으로 먼저 기억한 날

그래서

그게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말 대신

조금씩 젖어가는 감정 같은 것들


신호등 앞에 멈췄을 때

빗소리는 더 커졌고

너와 나 사이의 거리도

조금 벌어졌다


우산 천이 바람에 밀리는 소리

네가 손잡이를 조정하는 미세한 마찰음

나는 그 소리들이 말보다 더 많은 걸 알려준다고 느꼈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 장면은 끝을 향해 천천히 조명을 끄고 있었다


너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입술만 아주 작게 움직였고

그 작음이 내내 크게 들렸다

“그만 걷자”

바람 사이로 스쳐갔지만

분명히 들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내 귀에 닿는 모든 소리를

하나씩 받아 적고 있었다

비가 코끝에 떨어지는 소리

눈꺼풀 위에 닿는 가벼운 진동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는 습한 소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우리 사이에

조용히 깃드는 침묵의 숨소리까지


영원히 나를 안아줄 것 같던 빗방울이

나를 떠났다


우산 없이 걷는 사람들이

우산 아래 사람들보다

더 조용해 보였다


비를 피하는 사람들은

발소리가 컸고

급했고

무거웠지만


그 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만이

진짜로 듣고 있었다

비의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들

내려오는 물소리,

마음속에서 따라오는 소리들


나는

그중 하나였다

빗소리를,

그리고 너의 말 없는 소리를

아직도

그날처럼 듣고 있었다



keyword
화, 목, 토 연재
이전 20화비상 탈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