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수영을 배우면서 나는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 팔을 내젓고 발을 차 올리고 왔다 갔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여기서 저기까지 오가는 그 시간이 참 멀고도 길었다.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하나 두울 세엣 넷- 숫자를 세어도 이건 너무 길다. 50분의 강습이 끝나자 나는 한참의 숨을 내쉬었다. 이 지루한 걸 월수금 반복한다니.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이면 마음속에서 자꾸 다른 일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2달 넘게 자유형을 하는가 싶더니 강사님은 순식간에 배영과 평영과 접영을 가르쳐주셨다. 조금씩 부족하고 호흡이 무너졌지만 이걸 하다 저걸 하고 또 뒤집었다가 돌아오니 살 것 같았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네가 아닌 것 같으면 고개를 돌리고 지루하면 새로운 것을 열어보면서. 오래도록 움직이는 구름보다는 쨍쨍한 햇살과 세찬 후 사라지는 소나기가 좋았던 거다.
50미터 풀 끝까지 가는 것만 해도 알 수 없는 성취감이 솟아나는 일이었다. 워낙 수영을 좋아하고 잘하는 파트너는 내가 1바퀴 마무리할 때 2바퀴를 향해 간다. 50미터의 끝에서 360도 회전을 하고 발로 벽을 차고 솟나아가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 숨 참고 고개를 집어넣고 팔을 돌려서 회전하고 딱-이라고 들었지만 코로 들어오는 물을 대차게 느끼면서 나는 180도 옆으로 흐느적거렸다. 그리고 그 없이 혼자 허우적거리던 그날, 나는 깊은 곳으로 코를 박고 팽그르르 도는 내 몸을 만날 수 있었다. 두 발로 벽을 차 냈을 때의 시원함이란! 그런데 며칠 후 내가 턴 하는 것을 보던 그의 말에서 나는 또 구름을 생각했다.
나는 그 턴을 위해 수많은 영상을 보고 고민하고 폼을 생각하며 도는 연습을 했었는데. 너는 그냥 계속해보면서 부딪쳐서 그냥 해버리는구나.
우리의 처음도 그랬다. 형 도대체 우린 뭔가요? 수줍고 말도 적어 보이는데 유독 나에게 끝없이 장난을 치는 그에게 참다 참다 내가 한 말이었다. 그게 옷을 빼앗긴 선녀처럼 내 두 팔에 두 아이를 안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는 오래도록 지켜보고 애정하고 마음을 준다. 나는 마음을 주었다가 접었다가 다시 준다. 그러므로 당신은 구름처럼 오래도록 여전히 가고 있지만 나는 뜨고 지고 뜨겁다가 식어가면서도 머물고 있다.
가끔 나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세상 나이를 먹어가도 까불까불 철없는 내가 입을 꾹 다문다는 건, 많이 화났다는 것이다. 그거 아니라고, 삐진 거 아니야, 상처받았다고, 그렇게 너는 모르지, 항상 그랬어 너는, 역시 아니었던 거야,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 처음은 구멍 나기 시작하는 상자 모퉁이 같은 것이었다가 물에 젖은 상자처럼 급격히 벌어지고 찢어지고야 만다. 마음, 감정이란 그런 것. 누가 아니고 너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을/를 하지 않는다였지만 결국, 나는 당신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가 된다.
지극히 나 중심적인 마음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나는, 아침에 울리는 알람을 확인하며 쌓여있는 메일들에 골치가 아프다. 무언가 할 것이 많아지는 오늘. 창문을 열자 저건 무슨 꽃이지? 어제와 달리 한꺼번에 피어있는 분홍빛. 금세 기분이 좋아져 커피를 내리며 라디오를 켠다. 아침은 프렌치토스트- 저장해 둔 피드를 열고 토스트를 구워보려는데 레시피에 대강 나의 스타일을 맞춰본다. 소금은 짜니까 줄이고 설탕 대신 꿀로. 파트너는 먹고 출근을 하고 아이들은 간이 안 맞는다고 잔소리를 한다. 싫음 말아라. 그들에게 냅다 소리를 지른다. 돌아오는 길, 하늘에 구름이 없다. 사진을 찍어 그에게 보낸다. 하늘 좀 보아! 힘내고 하트-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다. 기분이 다시 올라간다.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영어를 듣고 문장을 읊조린다. 아침형 인간이라 유사한 시간에 일어나 식물들은 돌본다. 그늘 밑에서 나날이 시들어가는 잎을 안타까워하다가 떼어주면 더 높이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째 물을 열심히 주었더니 핑크색 장미가 가득 피었다. 일어나면 보라고 해야지. 커피를 마시고 라디오를 들으며 토스트를 먹는다. "잘 먹었습니다." 언제나처럼 말하고 묵묵히 나갈 준비를 한다. 버스에 올라 멀리 내다보니 맑은 날의 시작이다. 사진과 이모티콘으로 오늘을 표현하는 그녀에게 뭐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고마워 이따 봐요-라고 답 한다. 조용히 아침 인사를 하며 오피스에 들어선다. 자리에 앉아 차분한 하루를 보낸다.
아마도 이럴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금세'와 '묵묵히'이다. 나는 부단히 표현한다. 끝없이 사랑하고 쉼 없이 즐겁고 영원히 감각하고자 한다. 그는 한결같이 사랑하고 변함없이 평안하고 내일도 오늘처럼 안온하고자 한다. 나는 나가고 싶어 하고 그는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놀이공원 시설 다 타보고 싶은데 그는 밑에 앉아서 볼게요 한다. 당신은 왜 안 사랑해-라고 난 말하지만, 그는 언제나 사랑했어요-인 거다. 나는 빨리 뜨거워지고 급격히 식어지나 그는 항상 변함없는 온도임을, 사랑의 높낮이가 가파른 나와 달리 완만 곡선으로 그 자리에 있는 그를 보는 것. 그 오랜 기다림으로 나는 언젠가부터 깨닫게 되었다.
당신이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이렇게 말한 적은 없을 것이다. 나조차 오글거려서 나도 알아-정도만 했을 거다. 그리고 분명히 알지만 나는 또 실망해서(곧 죽어도 삐져서는 아닌 거다) 당신의 머뭇거리는 표현에 서운해서 고개를 획 돌리기도 할 거다. 그러나 달라진 건, 그 사랑이 때론 얄밉고 서운하지만 올곧고 분명하게 사랑함을 이제 안다는 거다.
MBTI로 시작한 이야기였다. 유행처럼 번지는 그 성향 맞추기에서 나는 그와 나를 하나둘씩 찾을 수 있었다. 어머 너무 맞다, 이건 내 얘기이고 우리 이야기네라고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반대의 성향에서 역시 맞군,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하고 핑계를 댈 수는 없다. 나는 나이고 그는 그이기 때문이다. 성향에 의한 나와 당신이 아닌 세상 유일무이하게 만난 당신과 내가 아닌가.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이 어느새, 내가 살아온 날들의 절반이 되어간다. 그 시간이 내게 준 여럿 중에서 분명하게도 당신에 대한 믿음이 남았다. 앞으로도 내가 먼저 말하고 움직여 달려가겠지만, 나는 안다. 이렇게 철없는 나를 당신이 사랑하기에 그렇게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랑하고 종종 아프고 등짝을 때려주다가 다시금 웃지만 두고두고 사랑할 것이다. 엔프피의 괴로움이 아닌 내 사랑에 대한 고백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형 그리고 여러분
p.s. 나 infp 야. istj 아니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지극히 반대인 것을. enfp랑 살아서 물든 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