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뜨겁게 앓다, 마흔의 사춘기 6>
“야, 무슨 여자들이 돼 가지고! 명절날 아침부터 여자들이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만두고 밥이나 차려!”
순간 블랙아웃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2024년을 시작하는 설날 아침이었다. 조카의 학교 생활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실에는 커다란 상 3개 펼쳐져 있었고, 이미 밥과 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음식은 아빠가 말씀하신 여자들을 중심으로 세팅이 된 뒤였다. 밥이 아직 안 되어 기다리며 잠시 이야기 나눈 게 화근이었다. 순간적으로 거실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느닷없이 소리치며 화를 낸 아빠는 자리에 앉아 계셨고, 오빠는 안마 의자에, 남조카들은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나의 딸들과 여조카들은 한쪽에 모여 앉아 있었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여자들이요? 지금 여자들이라고 하셨어요?”
“시끄럽고! 밥이나 차려!”
하... 머리는 멈췄는데 가슴은 너무도 빨리 뛰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눈물이 내 발끝부터 시작해 허리를 지나고 가슴을 채웠고, 이내 얼굴 안까지 가득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집 안은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다시 움직였다. 갑자기 터진 아빠의 큰 소리에 흐른 정적도 잠시, 이내 다시 자신들의 일을 찾았다. 이 이상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정말 나뿐이었을까? 내 떨리는 목소리에 반응해 나를 바라보는 내 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 된 밥을 엄마가 퍼주셔서 날랐다. 그리고 나는 방에 들어가 버렸다.
“상이 좁으니까. 여자들은 2차로 먹자.”
“나는 배고픈데?”
“그래. 그럼 너는 여기 끼어서 먹어.”
누구와 누구의 이야기였을까? 아마도 언니와 여조카의 대화인 듯했지만 보지 않았기에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실의 풍경은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훤했다. 언제나 그랬듯 이 집안의 남자들을 중심으로 기다랗게 펼쳐진 상이 채워지고 남은 자리에 어린 여자 아이들이 끼어 앉았을 것이다. 언젠가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들 사이에 내 자리가 마련되었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이었는지, 누군가의 배려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그 아침상에 함께 있지 않았다. 딸 둘이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소리 지른 할아버지의 어조에 너무 놀라 그 문장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사정없이 흔들린 엄마를 느낀 것이다. 당시의 나는 허공인지 우주인지 모를 그 어딘가에 붕 떠서 풍선처럼 방방~ 갈 길 몰라 헤매고 있었다.
“밥 먹자. 막내야.”
“안 먹어. 무슨 여자가 돼 가지고 명절날 아침부터 밥을 먹어, 먹기는.”
한참이 지난 뒤, 2차 아침 준비가 된 것을 알리며 방에 들어온 언니에게 말했다. 화가 났지만 크게 소리 내거나 길게 말할 수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방 전체를 채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서러움과 반항의 마음이 가득 찬 채로 2024년 설날 아침을 끝끝내 걸렀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짐을 챙겼고, 원망 섞인 엄마의 표정과 당황하시는 아빠의 얼굴을 모른 채 하며 딸들과 함께 집으로 와 버렸다. 2시간을 운전하는 데, 많은 일들이 내 머릿속을 지나가며 눈물이 흘렀다.
그날 나는 왜 그랬을까? 상황이나 말은 달랐지만 사실 나는 40 평생 그런 분위기에서 살아왔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가 계셨고, 남아 선호 사상이 누구보다 강한 할머니와 엄마의 영향을 온몸으로 받으며 자랐다. 억울한 일도 많았고, 화가 난 적도 많았지만 대들거나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나는 바로 대꾸했고,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들, 명절이라는 상황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냥 그 집을 떠나 버렸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드셨다. 본디 권위적이셨으나 많이 약해지셨고, 나이 드시며 말로 하는 실수가 늘어갔다. 속상한 일이 잦아졌지만, 지금껏 어찌어찌 지나왔단 말이다. 나는 왜 그랬을까? 나의 태도는 잘못된 것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두 딸은 그런 세상에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페미니스트에 대해 논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저 다 같이 모이면 단 한 번도, 컵 하나 나르거나 씻지 않는 이 집안의 남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모든 걸 당연시 여기는 우리 부모님이 답답하다. 요즘 시대에도 모든 음식이나 명절 준비를 여자들만 해야 한다는 걸 나만 이해 못 하는 것일까? 명절에 14명이라는 적지 않은 수의 가족이 모이지만 모든 식사나 과일 준비는 여자 몇몇이 책임지고, 청소와 뒷정리까지 하는 상황이 나는 더 이상 이해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것이 이 집안의 규율인 것처럼 행하는 부모님도, 그것을 지금까지 따라온 나도 싫을 뿐이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맞이하면서, 철없이, 내 안에 반항이는 본격적으로 꿈틀대며 성장을 시작했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살아계실 적만 해도,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나보다 6살 많은 우리 집 장남인 오빠는 밥 먹을 때 빼고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라면 끓이는 것은 당연하고, 하다못해 물 한 잔도 떠서 가져다줘야 했다. TV 보며 드러누워 30cm 떨어져 있는 리모컨도 가져달라 다른 방에 있는 나나 언니를 부르곤 했다. 오빠의 심부름을 거스르기라도 하면 할머니의 불호령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리 편이 되어줄 거라 믿고, 중재자가 되어주길 기대했던 부모님 또한 당연히 오빠가 먼저였다. 어린 내게는 금은보화가 가득 든 보물상자처럼 느껴졌던 과자 선물 세트가 가끔 들어오면, 오빠가 학교 다녀올 때까지 박스에 손도 못 대고 기다려야 했다. 나이 차로 인해 늘 집에 먼저 와있던 나는 졸음을 꾹 참으며 오빠의 하교를 기다리곤 했다. 집에 온 오빠가 당당하게 박스를 열고 맛있는 간식을 챙겨 자신의 방으로 가며 나와 언니에게 박스를 건넸다.
“이번엔 특별히 인심 썼다. 이거 다 먹어!”
오빠가 남긴 박스에 쓸쓸하게 남은 것은 양갱과 껌, 그리고 인기 없는 과자 한 두 개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뭐라 불평하면 다음에는 수가 더 줄어드니 아무 말 없이 받았다. 심지어 나는 먹을 게 하나라도 남아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기뻤던 것 같다. 그리고는 당연히 언니 차례라는 생각에 상자를 잡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면, 나보다 4살 많은 언니는 매번 미소 지으며 박스채 넘겨주었다. 어린 내겐 딱 천사의 모습이었다.
“막내 좋아하는 과자 하나만 고르게 해 줘.”
라는 말도 잊지 않고 오빠에게 전했다. 물론 바뀌는 건 없었지만, 그 한 마디가 내겐 꽤 든든했다. 나이 차이 있는 오빠가 고등학교 졸업과 1년간의 재수 생활을 끝마치자, 학교에 들고 다니는 점심과 저녁, 두 끼의 도시락 반찬에는 혁신이 일어났다. 더 이상 고기나 햄은 물론이고, 그날 이후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표 돈가스를 평생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식탐도 많고 먹는 즐거움이 컸던 나는 자주 서운했지만, 막내에다가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기에 함부로 불평하진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요.”
늘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나마 싸고 편하다 들은 참치 넣은 볶은 김치 하나면 행복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도시락 반찬은 언제나 김치 볶음이었고, 계란과 콩자반, 멸치볶음이 번갈아 콜라보를 이루었다. 그런 모습으로 나는 삐삐를 지나 시티폰과 핸드폰이 등장한 1990년대 말을 살아가고 있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나도 있는데,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지금까지 참아온 엄마도 있는데... 네가 참았어야지...”
2024년 설날 아침의 일은 내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엄마나 아빠는 나의 행동이 더 큰 충격이었나 보다. 엄마는 한참이 지난 뒤 통화에서 내게 원망 섞인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하지만 그 말은 내 안의 반항이를 더욱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옳지 않은 걸 알고 있다면, 그렇게 평생 살아서 힘들었다면, 안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적어도 노력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무엇보다 내가 그 고통을 안다면,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반항이의 생각들이 나를 온통 감쌌다. 울기만 하는 엄마께 그런 말을 다 뱉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덮고 지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 나는. 적어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이제, 그렇게 안 살 거야. 그리고 내 딸들도 그렇게 살게 하지는 않을래.”
내가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하고자 노력해서 나온 말들이었다. 마흔에 들어서자 내 안에는 반항이라는 아이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언제, 어느 시점에 태어나,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꽤 많이 자라,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자발적 퇴직, 학교를 탈출하기 전, 새롭게 옮긴 시골 마을의 작은 초등학교에 출근 한 지 2주쯤 됐을 무렵이었다. 1교시 수업이 시작되어 아이들과 한참 활동 중이었는데, 갑자기 교실 전화가 울렸다. 보통 수업 시간에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외부 전화를 교실로 연결하지도 않고, 내부에서도 전화를 최대한 피한다. 물론 나는 수업이 있는 오후 3시까지 핸드폰도 무음으로 둔다. 그런 상황에 교실 전화가 울린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싶어 수업 중 울리는 교실 전화를 받으니 왜 핸드폰을 안 받느냐며, 차 키를 가지고 내려오라 했다. 수업 중임을 밝혔지만, 그래도 지금 내려오라는 이야기에 아이들에게 할 일을 안내하고 차 키를 챙겨 내려갔다. '사고인가?'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한 채 내려갔는데, 주차장에 간 나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주차된 내 차를 옮기라는 것이었다. 이유라는 것을 듣고 서 있자니, 내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이 학교 주차장은 출입구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현관 입구에서 가까운 양쪽 주차장 자리는 교장, 교감, 교무부장, 행정실장의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니 비어 있더라도 비워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껏 그냥 빈자리 아무 데나 주차를 했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하필 그날 아침에 나는 교장선생님의 주차 자리에 차를 놓은 것이다. 갑자기 반항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무슨 요즘 세상에 주차장 자리를 지정해? 그리고 지정할 거면 당당하게 써놓기라도 하지. 무엇보다 수업 중에 이걸로 부를 일이야?’ 며칠 뒤 점심 먹고 교실로 가는 나와 마주친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내 자리에 주차한 게 한 선생님이었다면서요?”
“네~ 주차 자리가 정해져 있는 줄 몰랐어요.”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이건 무슨 의미지?'라는 생각이 남았다. 내가 사과라도 했어야 하는 것일까? 글쎄. 나는 참 이해가 안 되었다. 이 조그마한 학교에, 이 작은 주차장이 넓으면 얼마나 넓다고, 주차 자리까지 찜콩이라니! 나의 반항이는 그렇게 또 성장했다.
다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치료사 분이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왜 교사를 그만두었어요? 너무 아깝지 않나? 그리 좋고 편한 직업을?”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19년을 몸담았던 교직을 떠난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제약. 나는 얽매이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선생님이기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수없이 많은 것도 싫었고, 뭐 하나 하려 해도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이 내가 마치 죄를 짓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또한 부모님께서 내게 입혀준 교사라는 제약을 과감히 깨부수고 싶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학교 다니는 게 참 싫었던 1인이다. 공부를 잘한다고 학교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나는 학교를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자라면서 이것저것 하고 싶다 이야기하는 내게 언니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 했는데... 결국 현실은 다시 학교로 귀결이었다. 그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이른 퇴직을 선택했고, 결국 학교를 탈출했다. 그리고 그 공은 나의 반항이에게 돌려야 할 것 같다. 이 녀석이 제법 튼실하게 잘 커 주었다. 때로는 실수 아닌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너무 과격하지 않으면서도, 야무지게 할 말을 하는 반항이었다. 무엇보다 나의 행복을 중심에 두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 녀석이 나는 꽤 마음에 든다.
나는 큰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소심한 쫄보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이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나는 나의 인생을, 나의 삶을 좀 바꾸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의 반항이를 잘 먹이고 잘 가르쳐서 키워나가고 있다. 당신의 반항이는 어떠한가? 아직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자신을 잘 살펴보자. 분명 당신 안 그 어느 곳에선가 당신의 반항이는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이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 거칠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나를 도와 내 인생을 멋지게 바꾸는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키워 보자. 때로는 10대의 자녀들과 각자 자신의 반항이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며 서로 상담해 주는 것도 좋은 반항이 양육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 아이들이나 우리나 비슷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10대 이후 가두어 두었던 반항이를 이제는 풀어주고, 원하는 모습으로 잘 키워 보자. 반항이도 알고 보면 꽤 매력적인 친구이다. 무엇보다 마흔을 시작하며 반항이를 친구 삼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단, 지혜롭게 해야 한다. 우리는 십 대가 아닌, 마흔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