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인정하면 비로소 보인다 1>
마흔이병을 치열하게 앓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두 딸과 함께 나들이 겸 2시간을 달려 낯선 지역의 커다란 건물 안 널찍한 강당에 들어섰다. 세종특별자치시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직업계 고등학교 진로 페스티벌 행사 중 하나로 열리는 곽정은 작가의 강연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남들이 보면 나의 딸들을 위한 방문이라 여기겠지만, 실은 내가 듣고 싶은 강연이었다. 마흔에 하고 있는 나의 방황은 진로 고민에 빠진 십 대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기에 나에게 꼭 필요한 강연이 될 것 같았다. 강연을 소개하니 흥미를 보이며 즐겁게 따라나선 두 딸과 함께 참석한 강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돈, 시간, 나이 등 그 어느 것에도 제약이 없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정확한 단어나 배열은 아닐지라도 내가 기억한 그 강연의 핵심 질문은 바로 이 문장이었다. 몇 장의 인쇄물이 제공되었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 덕목들을 찾아보는 활동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자주 내게 물었다. 나에게 아무런 제약이 없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가? 너무도 쉬워 보이는 그 질문은, 사실 마흔을 넘어 일상을 살고 있는 나에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마흔을 살아가는 다른 어른들에 비하면 다소 철이 없고 생각이 자유분방한 나였지만, 그런 나조차도 나의 생각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면 둘러싼 많은 것들이 스멀스멀 얼굴을 비치며 방해공작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금세 이런저런 생각들에 '이게 가능할까?'부터 시작해서 '무엇 무엇 때문에 어렵지' 등... 불필요한 생각들이 내 손을 부여잡곤 했다. 미국 작가인 로버트 브롤트(Robert Brault)의 말처럼 진짜 장애물을 만나 목표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눈앞에 자꾸만 덜 중요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서 내 목표를 적기 쉽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적고 싶은 목표에서 멀리 떨어져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질문이 참 마음에 들었고, 꽤나 오래 그 문장에 질척였다. 강연장에서 적었던 내용은 그날 이후 여러 날에 거쳐 지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자리를 굳건히 다져가고 있었다. 마음에서 자꾸만 '안 되지. 그럴 수 없잖아?'라는 마음이 밀려오려 하면, '어차피 상상이잖아. 뭐가 문제니?'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툭 밀어내 버렸다. 새로운 것이 생기면 추가하기도 했고, 다시 처음부터 적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적고, 또 적어 내려갔다. 몇 개월이 지나면서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들이 어느 정도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고,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나는 내가 적은 내용들의 가지를 치며 연결 지어 묶어 내려갔고, 모든 내용을 크게 보려 애썼다. 궁극적으로 내가 꿈꾸는 미래 모습을 위해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면 좋을지를 생각했다. 나는 내가 제법 자랑스러웠다.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장하고 있다 여겼다. 이제 행동하기만 된다 생각했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우주의 그 어느 행성만 한 돌 덩어리가 쿵! 하고 떨어졌다. 나는 충격에 빠져 한참을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거... 진짜 맞아? 뭔가... 이상한데?”
한참만에 내 안에서 나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었다. 몇 달 동안 너무도 멋지게 잘 해내고 있다 여겼던 나였는데, 퇴직을 몇 개월 앞둔 시점에 큰 혼란이 왔다. 내가 적은 메모를, 가고픈 길이라고, 하고픈 일들이라 적은 그 내용들을 여느 때처럼 가만히 바라보던 날이었다. 언제나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은 나답게 참 많은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나름의 가지치기와 묶기를 통해 크게 세 개의 항목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순간적으로 나를 스쳐갔다.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큰 항목의 내용들은 내가 스무 살을 맞이하던 그때, 그토록 가고 싶던 길이었다. 그 후로도 대학교 2학년을 시작하며,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 그리고 교직생활 5년 차에 그토록 가기를 원했던 모습이었다. 가운데 큰 항목은 내가 교직생활을 시작하며 처음 관심을 가졌던 분야로, 이후에도 몇 번을 후회와 고민을 반복했던 길이었다. 그래서, 새삼 내가 본 것이 무엇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놀란 것일까? 내가 확고하게 원하는 것이라 믿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적어 내려간 그 문장들에, 너무도 익숙한 그 내용들에 새삼 충격을 받을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날 나는 적힌 내용을 토대로 10년 뒤 나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 세상 무슨 일이든 그렇듯이, 적은 내용들을 아무런 제약 없이 다 성공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10년은 투자하고 열정을 다해야 그 모습 비슷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10년 뒤. 50에 들어서 있을 나의 모습. 그런데 첫 번째 항목도, 두 번째 항목도 완벽하게 이루어진 모습을 상상했을 때, 10년 뒤의 내 모습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게 이 모습인가? 진짜 10년 뒤에 이 모습이면 나는 행복한 거야? 아닌 것 같은데? 이거... 아니잖아!”
그랬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보였다. 내가 그토록 처절하게 몸부림치면서 원하는 모습이라고 적었던 큰 세 덩어리 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진짜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의 내가 원하는, 10년 뒤의 내가 행복해할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모습들은 정확히 20년 전, 그리고 10년 전 내가 원했던, 하지만 생각에 그치고 행동하지 못했거나, 행동하려 했다가 금세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렸던 모습이었다. 나는 그저 과거의 향수에 젖어 미련을 못 버린 것뿐이었다. 그제야 그게 보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다 허상이구나. 다 거짓이야. 다 잘못되었다. 나는 다시 보아야 한다. 나는 이제 인정해야 한다. 더 이상 과거에 취해, 예전에 못한 일들에 미련을 보이는 멍청한 짓을 그만두어야 했다. 나는 이제 지금의 나, 10년 뒤의 나를 바라보아야 했다. 더 이상 나는 19살도, 스무 살도, 29살도 아니다. 이제는 진짜 과거의 나를 툴툴 털어버리고, 멋지게 보내줘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그렇게 나의 과거와 현재를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미련한 후회와 원망 속에서 살았는지가 보였다. 결국 매 순간 선택하고 길을 나선건 나였음에도, 늘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를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책임을 돌리곤 했다. 인정하니 비로소 보였다. 다 나의 선택이었고, 결국 나의 책임이구나!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 말이다.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과거의 나와 아름다운 이별을 했다. 그제야 나의 현재를 바라보았고, 그렇게 내가 진짜 원하는 나의 미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인정. 마흔에 얻은 나의 첫 번째 미덕은 바로 <인정>이었다. 나를 지금 모습 그대로, 나 그대로 인정하는 것. 남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못하고 있었다. 과거의 나를 지난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내가 하지 못한 것,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해 토닥토닥 위로하고, 이제는 제대로 된 이별을 하는 것. 결국 그 모든 선택과 진행은 다 내가 한 일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시작이었다. 나의 현재를 행복하게 하고, 나의 미래를 밝게 비춰주는 시작. 그것이 바로 인정의 힘이었다.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보인다. 나는 마흔이다. 인정할 줄 아는, 어제와는 다른, 제법 멋져진 마흔이다. 인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인정하니 과거가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아닌, 어린 나의 미숙함이었구나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정하니 나의 길, 나의 꿈, 나의 미래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겠다 싶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10년 뒤의 나의 모습은 그렇게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후로 나는 제법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게 맞니? 10년 뒤, 이 모습이면 되는 거야? 행복하니? 10년 뒤에, 행복하겠니?”
누구에게나 현재가 있듯, 누구에게나 과거는 존재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자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현재를 살아간다. 과거의 나와 아름다운 이별을 해야 한다. 그래야 현재의 나를 제대로 만날 수 있고, 미래의 나와 멋지게 마주할 준비가 가능하다. 부정하지 말자. 과거의 나를 인정해 주면 된다. 그리고 현재의 나를 인정하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미래의 내가 인정될 것이다. 이렇게 작은 깨달음이 나에게 찾아오고, 마음이 편해지니, 마흔이라는 녀석이 나쁘지만은 않네?라는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진다. 바람이 분다. 아직 조금 쌀쌀하지만 그래도 햇살이 따스하니 좋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