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뜨겁게 앓다, 마흔의 사춘기 5>
<뜨겁게 앓다, 마흔의 사춘기 1>
"사람은 사람을 가까이해야 해. 너무 그러지 마."
엄마의 걱정 어린 소리가 강한 어조로 튀어나온 뒤, 내 앞으로 나지막하게 흘러간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많은 이야기가 쏟아지지만, 나는 그대로 흘려보낸다. 바람이 참 좋다. 아는 사람 없는 시골로 들어온 지 2년째 되는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연락 온 지인의 전화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받지 않고, 이내 덮었다.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 엄마와 함께 텃밭에 쪼그려 일을 하던 중이었다. 왜 전화를 안 받냐는 엄마의 물음에 높낮이 없는 어조로 담담히 답했다.
"그냥... 알던 사람. 연락받고 싶지 않아서. 요즘엔 그냥 이렇게 조용히 있는 게 좋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전화 통화 하고 싶지 않네."
사실이었다. 그즈음 나는 솔직히 핸드폰 자체를 없애고 싶었다. 핸드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불필요하게 수시로 울리는 쪼끄만 기계가 참 밉게 느껴졌다. 그 시기 직장에 다니지 않았다면 나는 핸드폰을 이미 없애버렸을 것이다. 연락이 중요한 직업이었기에 없애지는 못했지만, 집에 오면 최대한 나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놓아 내 마음을 소심하게나마 표현하곤 했다. 그 시기 가끔 나를 찾는 이들의 연락은 반가움보다는 부담스러움으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나의 통화에는 부재중 기록이 쌓여갔고, 카톡앱에는 천 단위의 알림 숫자가 고개를 빼꼼히며 문자 메시지와 그 수를 경쟁하듯 늘리고 있었다. 이전의 나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이라도 알림이 뜨면 그 숫자를 없애는 게 내 숙명인 것처럼 살았다. 시간을 넘어 분을, 분을 쪼개 초단위로 살았다. 많은 이들과 연락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주 쓸쓸했고 문득문득 외롭다 느끼곤 했다. 이 무서운 세상에 나 혼자 서 있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유독 나만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바쁜 세상에서 빠져나오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는 아주 편안해졌다. 시끄럽지 않아 좋았다. 불필요한 대화가 오가지 않아서 행복했다. 그렇게 나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많이 아픈 이후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싫어졌는지, 약의 부작용으로 한꺼번에 불어나 좀처럼 빠지지 않는 나의 몸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20년 가까이해 왔던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의 존재에 지치고 지쳐 외면해 버린 건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시작이 언제였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 뚝 떨어져, 조용히 있는 게 편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마음도 어지럽지 않았고, 초조해하거나, 조마조마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힘을 뺄 필요도 없었고, 좋은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이들의 기분을 파악하고 맞추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이곳에선 비교도 없었고, 경쟁도 없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해도 땅이 나를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하늘은 여전히 나를 품어 주었다. 배신이나 내 뒤통수치는 존재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 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의 대화를 했고, 묵묵히 흙을 파고 식물을 심고 관리하며 재미를 느꼈다. 무엇보다 나의 정성보다 더 큰 열매와 결과물을 안겨주는 자연의 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황홀이라는 단어가 내 삶에 들어왔다. 예전처럼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예전보다 훨씬 폭넓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지금은 나에게 이런 조용함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게 필요했다. 그게 좋았다.
그렇게 시간이 3년이 지나고, 4년에 다다르자 나의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나갔다. 아니, 거의 대부분 멀어진 것 같다. 하지만 아쉬움은 전혀 없다. 어차피 정리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싶다. 물론 여전히 아주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안부를 묻고, 문자나 카톡을 통해 이전의 아름다운 기억을 전하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 감사할 따름이다. 역시 나는 복이 참 많은 사람이구나! 를 문득문득 깨닫게 해주곤 한다. 오랜 시간 나라는 부족한 사람을 기억해 주고 살포시 두드려주는 분들께 마음 가득 담아 행복하게 답한다. 딱 거기까지가 지금은 좋다. 이러다 또 어느 날은 그들을 만나러 집을 나서는 날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 날이 없어도 큰 문제는 아니다 싶다. 이제는 핸드폰을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은 들지 않는다. 내 생활에서 필요한 곳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그 자그마한 기기의 연락처에 담긴 수천 개의 불필요한 가지들이 무겁게 느껴졌다. 핸드폰도 가지치기를 해야겠구나! 연락처를 열어 ㄱ부터 시작해서 기억에도 없는 이름들을 선택하고 삭제를 누른다. 얼마에 걸려 끝이 날지 모르지만, 적어도 다음 핸드폰을 사기 전까지는 할 수 있겠다 싶다. 일로 하기보다는 생각날 때, 가벼운 마음으로 한다. 하루에 30개, 때로는 50개씩 비워진다. 좋은 것들만 남기고 과거의 많은 것들을 그렇게 삭제하고 있다. 휴지통에 들어가 완전 삭제까지 잊지 않는 철저함을 보이는 나의 모습에 그저 웃음이 난다.
나는 참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참 잘 웃는 사람이다. 하지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사뭇 다르다. 지금의 나는 웃고 싶을 때 웃는다. 누군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웃는 일 보다, 나를 위해, 감사한 내 주위 모든 것에 감탄하며 웃음 짓는 일이 더 많다. 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것보다 혼자만의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과거의 나는 사람들과 누구보다 잘 어우러지고, 따스하게 잘 지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가장 추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나였다. 그래서 나는 떠난 것 같다. 내가 굳이 따스하게 보듬어 주지 않아도 잘 지낼 사람들로부터 조용히 발을 돌린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도움이 필요한, 떨고 있는 나를 따스하게 품어주기 시작했다. 이제 알았으니 그렇게 살면 된다. 굳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 모든 것에 맞춰 나를 힘들게 괴롭히고 싶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책을 통해 이야기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사람을 떠나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조금은 딴지를 걸고, 여지를 두고 싶다. 때로는, 정말 힘들고, 정말 지친 그 누군가에게는, 그 사람이라는 존재가 너무도 버거울 수도 있다고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두 번째 문제이다. 먼저 챙겨야 할 사람이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면 그 누구와도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 비행기에서도 늘 이야기해 주고 있지 않은가? 본인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챙기라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챙기고, 우리 자신과 먼저 관계를 맺어야 한다.
2022년 내가 한참 세상에서 몸부림치며 등을 돌리고 있을 때, 나의 글에 자주 적혀있던 문장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우연히 지나다 예고편을 보았는데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게 아니었어?라는 반가움이자,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라는 궁금증이 몰려왔다. 그렇게 그 드라마가 종영될 무렵 나는 1화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편 보지 않고, TV를 꺼버렸다. 화가 났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던 여주인공이 너무 많은 일들을 자진해서 하고 다니는 모습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새롭게 이어지는 많은 관계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디에 적어두었는지 모르지만, 내 기록 노트 어딘가, 또는 내 작품 파일들 어느 구석에 열정적으로 적었던 글이 남아있을 것이다. 2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이제는 그 드라마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된다. 드라마의 특성상 자칫 우울하고 어두워 보이는 부분을 오래 끌고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앞부분을 생략했을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그 앞부분에 있었던 나에게, 중반 이후의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반감을 불러일으킨 게 아닐까? 그만큼 나는 작고 초라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동안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딸 둘의 손만 붙잡고 타지로 넘어온 뒤 보낸 지난 4년의 시간 속에서,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감사한 관계를 제법 좋은 모습으로 이어왔다. 또한 퇴직 후 1년 1개월 남짓의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에 열심을 다했고, 여전히 편안하지만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그 여자 주인공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지만, 제목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드라마를 이제는 용서하고 웃음 짓는다. 그 사이 많이 단단해진 나를 발견한다. 역시 겪어보지 않으면 함부로 비난하는 말을 꺼내면 안 되고,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입을 열면 안 된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혼자 끄적이며 화를 푼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말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는 지금까지 하던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게 무엇이든 이제 그만해야 하는 의미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내 안에서 갈망하는 그 무언가에 미치도록 빠져보고 싶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 말이 바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말이다. 그래서 소중하고, 그래서 놀라운, 그래서 참 멋진 말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할 용기를 하루빨리 자신 안에서 찾길 바란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괜찮다. 그것까지 필요하다면 하면 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따스하게 꼬옥 안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너무도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열정적으로 하길 바란다. 아무것도 아닌 문장 같지만, 지나치면 안 되는, 너무도 귀한, 우리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문장이다. 아무것도,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