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1. 작가 설명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산수화의 지평을 연 인물이다.
그 이전의 산수화가 중국의 이상적 풍경을 모방했다면, 정선은 실제로 조선의 산과 물을 직접 답사하며 그렸다.
그에게 자연은 관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이었고, 그림은 기교의 과시가 아니라 자연 앞에 선 태도의 기록이었다.
‘겸재(謙齋)’라는 호처럼 그는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로 자연을 대했다.
자연을 정복하거나 재현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그 안에 자신을 놓아두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산수에는 늘 사람보다 자연이 크고, 말보다 침묵이 많다.
2. 작품 설명
〈고사관폭도〉는 깊은 산중, 절벽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는 한 고사(高士)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폭포는 화면을 가르며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떨어지고, 산은 층층이 겹쳐 깊이를 만든다.
그에 비해 인물은 화면 하단 한쪽에 아주 작게 배치되어 있다.
이 대비는 의도적이다.
자연의 압도적인 규모 속에서 인간은 주인공이 아니라 한 존재일 뿐임을 드러낸다.
폭포의 거센 흐름은 자연의 이치이자 시간의 흐름이며,
그 앞에 앉은 고사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을 감상하는 동시에, 자기 삶을 관조하는 자리에 있다.
필선은 거칠고 힘이 있으나 과장되지 않았고,
여백은 침묵처럼 화면에 머문다.
이는 자연의 소리보다 그 앞에 선 인간의 내적 고요를 강조한다.
3. 나의 감상
겸재 정선의 <고사관폭도>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폭포수 아래 고요히 자리한 한 선비를 바라보다가,
문득 내 지나온 시간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내가 선택했다고 믿었던 순간들,
내 힘으로 버텼다고 자부했던 날들.
하지만 이제 보니 그 모든 장면은 이 폭포처럼
한 방향으로 흘러와 지금의 나를
여기 앉혀 놓았습니다.
거대한 물줄기 앞에서 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쌓아온 성과도, 인내도, 공로도
꺼내 들지 않습니다.
더 높이 올라가려 애쓰지도,
다시 내려가려 주저하지도 않은 채,
그저 자신을 이 자리까지 데려온
수많은 흐름을 묵묵히 응시할 뿐입니다.
나 역시 그 풍경 앞에 서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삶은 늘 나의 능력과 수고로만 완성된 것처럼
나를 속여왔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내민 손길과 설명할 수 없는 우연,
그리고 돌이켜보면 기적에 가까운 은혜들이
겹겹이 쌓여 오늘을 만들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 풍경은 공허하지 않습니다.
비워짐은 결핍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이 멈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멈춤의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받은 것들의 크기를 가늠해 봅니다.
김진영 작가는 그의 유고집에서 '이별의 행복'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빈손이 되는 슬픔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받았음을 아는 사람만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고요한 감사의 순간일 것입니다.
겸재의 폭포 앞에서 나의 삶은 더 이상 ‘내가 이룬 것’으로 서술되지 않습니다.
대신 ‘살아지게 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 이해의 끝에서 나의 공로는 겸손히 물러나고,
그 빈자리를 따뜻한 은혜가 채우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