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

박래현

by 청일

1. 작가 소개


박래현(朴崍賢, 1920–1976)은 한국 근현대 미술에서 전통 동양화의 정서 위에 현대적 감각을 쌓아 올린 선구적 여성 화가다.

그의 작업은 사실적 재현에서 출발해 점차 형태를 절제하고 내면의 리듬과 정신성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박래현의 인물화는 외형보다 존재의 상태, 말보다 침묵의 밀도에 주목한다.

그가 그린 여성들은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이기 이전에, 생각하고 기다리며 스스로를 견디는 한 인간으로 화면 속에 머문다.


2. 작품 설명 〈여인〉


의자에 앉은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한 옥빛 저고리와 흰 치마, 단정하게 올린 머리.

그녀의 손에는 작게 접힌 종이학 한 마리가 들려 있다.


종이학은 이 작품에서 단순한 소품이 아니다.

그것은 말로 하지 못한 마음, 혹은 접어 두어야 했던 소망의 형상처럼 보인다.

한 번 접히면 다시 펼 수 없는 종이처럼, 여인의 시간 또한 쉽게 되돌릴 수 없음을 암시한다.


여인은 종이학을 바라보지 않는다.

쥐고 있을 뿐이다.

이는 희망을 붙들고 있다기보다,

이미 마음속에서 수없이 접고 접었던 생각을 조용히 감당하는 자세에 가깝다.


배경은 거의 비어 있고, 색채는 절제되어 있다.

이 여백 속에서 관람자는 여인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종이학이 만들어내는 침묵의 서사에 집중하게 된다.


박래현의 〈여인〉은 여성의 서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사유와 기다림, 체념과 희망이 동시에 공존하는 내면의 순간을 담아낸다.

작고 연약한 종이학 하나에, 한 인간의 삶과 감정이 고요하게 접혀 있다.


3. 나의 감상


그녀는 기도하는 자세를 하고 있지 않다.

그저 앉아 있을 뿐이고, 고개를 조금 숙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무심한 태도 속에서

우리는 이미 기도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기기만 해도

이 순간은 고귀한 시간이 된다.

그것은 나를 돌아보는 일이고,

결국 나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종이학 한 마리가 쥐어져 있다.

끝내 날아오르지 못한 꿈의 형상이자,

오래 품고도 접어두어야 했던 마음의 모양처럼 보인다.

그녀는 그것을 바라보지도, 내려놓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쥐고 있을 뿐이다.


남자로 태어난 나는

여자의 삶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삶을 통해,

여인의 시간이 얼마나 많은 침묵과 인내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 속 여인은

그보다 더 앞선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다.

화가 역시 화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아내로 살아오며

펼치지 못한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못다 한 꿈은

이렇게 생각에 잠긴 한 여인의 뒷모습으로

조용히 화폭에 남았는지도 모른다.


의자는 등을 받칠 수 있지만

그녀는 기대지 않는다.

완전히 기댈 수도,

완전히 등을 돌릴 수도 없는 자세.

그것은 누군가에게 매달리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세상과의 관계를 놓지 않겠다는

조심스러운 균형처럼 보인다.


두 손을 모아야만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지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기도일 수 있다.

이 여인은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깊은 기도를 하고 있다.


이 그림 앞에서 나는

위로를 받기보다 동행을 느낀다.

“너만 이렇게 조용히 버티고 있는 게 아니다.”

그 말 한마디를

그림이 먼저 건네는 것만 같다.


선물처럼 주어질 또 한 해를 앞두고

나는 오늘도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조용히 시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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