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정상화

by 청일


1. 작가 소개


정상화 (Chung Sang-Hwa, 鄭相和)는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로, 1932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후반부터 회화의 물질성과 제작 과정에 주목하며, 반복과 노동을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추상 회화 작업을 전개해 왔다. 그는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했고, 서구 미니멀리즘 및 모노크롬 회화와 교류하면서도 한국적 조형 감각과 수행적 태도를 유지한 작가로 평가된다.


정상화는 단색화를 단순한 색면 회화가 아닌, 행위·시간·물질이 축적된 결과물로 확장시킨 인물이다. 그의 작업은 1970년대 이후 한국 단색화의 물질적·개념적 깊이를 심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작품 설명


정상화의 작품은 격자 구조를 기반으로 한 단색 회화가 특징이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 고령토(백토)를 바르고 건조시킨 뒤, 이를 인위적으로 갈라지게 하거나 떼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후 생겨난 틈과 빈 공간을 다시 물감으로 메우는 방식으로 화면을 완성한다.


이 과정에서 화면에 나타나는 균열과 격자는 우연과 통제, 생성과 제거가 공존한 결과이며, 붓질보다는 물질의 변화와 제작 과정 자체가 작품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색채는 주로 백색, 회색, 담색 계열로 제한되며, 색의 표현보다는 표면의 구조와 깊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정상화의 단색화는 완성된 이미지를 보여주기보다는, 시간의 축적과 반복된 행위의 흔적을 드러내는 회화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한국 단색화가 지닌 수행성, 물질성, 반복성의 특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 나의감상


누구든 자신의 삶을 가만히 되짚다 보면 저마다의 색을 마주하게 된다. 어떤 삶은 무지갯빛처럼 요란하게 반짝이고, 어떤 삶은 끝내 무채색의 담담함으로 시간을 견뎌낸다. 세월은 공평하다. 우리가 어떤 생을 통과했든, 지나온 시간의 빛깔을 반드시 삶의 표면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기기 마련이다.


오늘 나는 정상화의 그림 앞에 서 있다. 격자무늬 속에 촘촘히 그려지고 덧대어져, 마침내 세월의 무게만큼 깊이 가라앉은 무채색의 단색화. 그곳에 화려한 서사는 없다. 오직 묵묵한 반복만이 고여 있는 화면뿐이다.


고령토를 바르고, 말리고, 떼어내고, 다시 그 빈자리를 물감으로 메우는 그의 작업은 고된 수행을 닮았다. 버려짐과 채움, 사라짐과 축적의 반복. 그 무수한 공정을 지나서야 비로소 하나의 세계가 완성된다.


우리의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추억은 다른 추억과 겹쳐지고 포개지며 서서히 단단해진다. 잊힌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이 덧입혀지고, 나이만큼이나 해묵은 조각들이 모여 비로소 ‘나’라는 형상을 빚어낸다. 그렇게 다져진 기억들은 어느 날 문득,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견고한 재료가 된다.


살아온 길에 어찌 굴곡이 없을 수 있을까. 기쁨과 희망, 절망과 좌절, 그리고 한때 날이 서 있던 노여움마저 시간이라는 무게 아래 서서히 스며든다. 생을 뒤흔들던 격렬한 감정들조차 세월 앞에서는 결국 낮은 온도로 가라앉는 법이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채색의 평화로움이 침묵처럼 남는다.


회색빛 캔버스 위에 남겨진 수많은 추억의 단편들, 삶의 결들이 고스란히 배어든 그림 한 점 앞에서 나는 지나온 궤적을 돌아본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 속 주인공이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질문을 나에게도 던져본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화려한 성취를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냈느냐는 태도에 있을 것이다. 삶의 끝자락에서 이 질문과 다시 마주했을 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 삶의 캔버스 또한 과하지 않은,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평화로운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기를 나는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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