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어떠한 시련과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의지하고 마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 관계. 그런 영원을 사모했고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주어진 짝이 예비되어 있다는 말을 종종 듣고 또 하기도 했다. 불가항력의 운명에 의해 맺어진 존재. 그것이 거대한 힘에 의해 예정된 일이라면 도대체 이 세상 무엇이 그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겠는가. 나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 위한 애절한 외침은 나의 10대와 20대 내내 메아리쳤다.
고통과 설렘에 순간을 내어주며 배신당하고 또 배신했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사랑을 믿고, 사랑이 덧없이 저물어 가는 과정을 반복하며 마음은 미어지고 시선은 열정을 잃어갔다. 나에게 말을 건네는 이성의 야릇한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지고, 배려와 설렘을 걸친 두 팔이 나를 끌어안아도 그 진의를 의심했다. 행복이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라 그저 생존을 위해 행복한 상태가 필요하다는 말처럼, 불변의 사랑을 믿는 것도 그저 성욕과 짝짓기를 유려하게 하기 위한 색칠놀이에 불과하지는 않을까?
어쩌면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너를 욕망해.'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욕망은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며, 내가 필요로 하지 않은 만큼, 욕망이 충족된 만큼 욕망은 줄어든다. 사랑으로 풍족해하다가도 머지않아 불행해하고, 또다시 자극적인 로맨스에 목말라하는 면모는 욕망의 생리현상과 닮았다. 다만, 욕망이라는 말은 마치 죄스러운 것으로,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것으로 평가절하되는 언어인 한편, 사랑이라는 말은 어릴 적 읽는 동화책처럼 순수하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감을 띤다.
'너를 욕망해.' 가련하고 쉽게 현혹되는 우리의 마음이 영원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에서 벗어나 던질 수 있는 고백이다. 마치 신을 믿다가 '신은 없다.'라는 생각을 처음 떠올렸을 때 가졌던 혼란과 공포처럼, '사랑한다.'에서 '욕망한다.'로 표현을 달리하는 것은 너에 대한 내 마음에 모독이 아닐까 두렵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랑을 바라면서도, 그 말이 꽤나 부담스럽고 서로를 지치게 하는 시점에서 '너를 욕망한다.'는 말이 조금 더 정직하게 여겨진다.
돌이켜보면, 붉은색 여드름을 뒤집어쓴 18세의 나에게 너는 무엇보다 순수한 욕망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여전히 너를 욕망한다. 너를 욕망하기에 나는 다시 살아있다고 느끼고, 너를 욕망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채워지지 않기에 죽어간다고 느낀다. 너를 욕망하기에 너를 사랑한다고 느낀다. 너를 소유하고 너로 나를 채우고 싶다는 이 나체의 욕망이 나는 이제 부끄럽지 않다.
살다 보면 너를 욕망하는 만큼 다른 것을 욕망할 수도 있다. 혹은 너보다 더 욕망하는 것들도 생길 수 있겠지. 어느 정도 욕망을 충족시키고 나면 네가 지루하고 매력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른 여자를 더 욕망한다고 느끼는 순간도 솔직히 있겠지. 너를 욕망하는 만큼 너를 사랑하기에 죄책감을 느끼고 허무하겠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건 우리가 먹고 자고 싸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너를 사랑해.'가 아니다.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 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지만, 솔직히 그 말은 서로에게 절망을 남긴다.
나는 너를 욕망한다. 너는 내 욕망의 기준이다. 무엇을 욕망할 때, 나의 모든 욕망은 너를 시금석 삼아 그 크기를 가늠한다. 만약 너와 걷다가 순간적으로 다른 이성에게 시선이 돌아간다면 그 이성을 흘기는 순간조차도 네가 내 욕망을 저울질하는 중심이다.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해놓고 너와의 행복한 시간들을 당연하게 치부해버리는 적응의 때가 오더라도 상관없다. 곧 사이가 소원해지고 네가 나에게서 멀어진다면 나는 다시 너를 욕망하게 된다. 욕망의 배가 채워지고 푹 꺼지는 생리의 리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너만이 내 욕망을 먹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너를 욕망하고, 가장 욕망한다. 또다시 욕망한다. 너는 내 욕망이다.
'나는 나를 발전하게 만드는 자극이 되는 사람이 좋아.' 그것이 너의 바람이라면. 내가 너를 원하는 만큼 네가 나를 갖고 싶게 만들겠다. 나보다 자극적이고 멋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다. 뒤쳐지는 부분들이 있겠지. 상관없다. 네가 뭇 남성들에게 더 호감을 느끼더라도, 그 욕망의 크기를 재는 단위가 내가 되고 싶다. 나를 떠올리면서 비교하고, 다시 내가 생각나게 만들고 싶다. 매번 나를 가장 욕망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매력적 이도록, 그래서 네가 상시 나를 욕망할 수 있도록 스스로 도전하고 성장하고 싶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내가 재미없고 지루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시간이 흘러 네게 슬며시 찾아오는 허전함과 외로움의 기저에 내가 떠오르게 만들고 싶다. 너의 영원한 사랑, 이상적인 사랑이 될 수 없어도, 끝없이 너를 자극하며 네 탐욕의 구심점을 차지하고 싶다. 네가 꼭 갖고 싶다던 아이의 얼굴 반쪽에 내 욕망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