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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인데....

  그녀를 생각하면 엘빈과 슈퍼밴드의 귀여운 다람쥐가 떠오른다.

귀여운 얼굴도 닮았지만 똑부러지는 목소리와 재치넘치는 말투가 딱 그 다람쥐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지는 않았지만 곁눈질로 보더라도 느낄 수 있는 캐릭터의 기발함, 말투 하나로 모든 논리를 이겨버릴 것 같은 다정하고 상냥한 말투, 하지만 때론 청량음료처럼 톡 쏘는 시원한 멘트, 무엇보다 주도적인 리더십~

이 모든 것이 그녀와 높은 싱크로율을 보인다.

  모둠활동을 할 때도 다른 모둠에 피해가 가지 않게 조곤조곤 말하면서 전체를 이끄는데 언젠가 그녀가 혼잣말로 "역시 난 선생님 재질이야~"라고 자부심에 차 말했을때 내 턱은 뇌의 신호를 받기도 전에 제어능력을 잃고 절로 끄덕끄덕 움직였던 적도 있다.

  무용 발표처럼 아이디어를 모아 전체 앞에서 발표할 때는 자신의 안무를 백프로 소화하는 동시에 다음 안무가 뭐였는지 헷갈려하는 친구를 번개처럼 캐치해서 음악소리에 방해되지 않는 낮은 어조로 "네모야 이제 세모랑 자리 바꿔야돼"라고 소곤소곤 지시하는 모습은 흡사 교직 삼십년의 대선배가 그녀의 몸에 들어가 그 작은 입을 조종하는게 아닌가 의문스러울 정도다.

  그런 그녀는 보호자동행체험학습을 낼 때도 다른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다. 솔직히 내 교직인생에 이런 아이를 또 만날까 의문스러울 정도인데...



  보호자동행체험학습이란 말 그대로 보호자와 동행하여 체험을 빙자한(?) 여행을 가는데 그것을 학습으로 인정해서 출석인정을 해주는..빙자라는 단어까지 끌어다 쓸 정도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정책이다. 왜 좋아하지 않느냐..

1. 여행이든 체험이든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인데 사적인 영역인 그것을 공적인 영역의 교육으로 인정해준다? 이것부터가 말이 안된다.  

2. 해당날짜의 학습을 못했으나 따로 보충학습은 이루어지지 않음이 사전에 안내되는데 그럼 학교에 오지않은 날의 학습은 가정에서 챙겨야하지만 사실 가정에서 따로 챙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어떤 아이가 체험학습을 가느냐에 따라 교사가 추후 학습을 따로 챙겨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신청서 받아 결재받고 보고서 받아 합철하고 출석부에도 출석인정체크해야하고 그 자체로 번거로운 일 투성인데 학습까지 챙기라니... 교사는 공노비가 확실하다...)

3. 그날 학교에서는 분수의 나눗셈을 배웠고 학생은 경주에서 첨성대를 구경했으나 학교에 출석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그 학생은 분수의 나눗셈을 배운 게 된다. 5~6시간의 학습이 없었으나 있는 것이 되는.. 마법처럼 놀라운 현상~

4. 방학있고 주말있는데 굳이... 평일에.... 체험학습을 가야하나... 잘하고 못하고의 결과를 떠나 과정에서 성실하고 빈틈없이 학교생활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가치인데...

5. 체험학습 가는 아이들이 꽤 많은데 날짜는 또 제각각이니 수업을 진행하며 지난 수업의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지난학습에 대한 언급을 하면 꼭 "선생님 저는 그거 안배웠는데요?" "선생님 저 그때 안왔는데요"....수업 시작부터 맥이 빠지고 지치는 기분..


뭐 더 쓸 수 있으나 더 써봤자 출석인정이 결석으로 바뀌지 않기에 점점 나만 구차하고 찌질해지는 기분이 드니 이제 그만...


그렇기에 나는 아이들과 충분한 래포가 형성된 1학기가 마칠 때쯤 넌지시 나의 의중을 스르르 풀기도 한다.

"얘들아 국어시간에 우리 이렇게도 배우고 사회시간에 모둠활동하면서 저렇게도 배우니 너무 재밌지 않니? 선생님은 우리반 친구들이 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배워나갔으면 좋겠어~ 가급적 매일 학교오면 좋겠다~"

(차마 보호자동행체험학습이라 콕 찍어 말 못하는 나의 찌질함이여....)



다시 돌아와서...

그녀는 올해 보호자동행체험학습을 두 번 신청해서 다녀왔는데 첫번째는 학부모 공개수업일이 겹쳤었다.

그때 그녀는 "선생님 체험학습 날짜를 바꿀게요. 엄마가 공개 수업을 보고 싶어 하셔서요"
(의잉? 신청서 냈는데 그냥 가도 되는데..결국 결재받은 신청서 찢고 다시 신청서 받아 결재받음.)

두번째 신청날짜는 모둠별로 사회조사학습을 마친 후 조사한 내용에 대한 영상 제작을 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그녀는 이미 신청서를 냈었고 나또한 영상제작 일정을 일주일 전에 공지했었다.

"오늘 어쩌고저쩌고 조사를 할 거고 수요일에는 이렇게저렇게 하고 다음주 월요일에는 최종적으로 내용 정리해서 영상제작을 할거예요"라고..

아이들은 착착 준비해나갔고 진행상황도 아주 순조로웠다.

그런데 영상제작일을 삼일쯤 앞두었나? 그녀가 내게 다가와..

"선생님 월요일 사회수업을 다른 날로 옮겨주실 수 있는지 엄마가 물어보라 하셨는데 옮겨주실 수 있나요?"

치밀하고 쫀쫀한 성격의 내가 이미 공지된 일정을 바꾸는 일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엄마가 물어보라 했다니!!

개인의 일정에 학급의 학사일정이 달라지는 일은 20년 경력의 베테랑으로서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그대로 갈건데 왜?"

"선생님이 바꿔주시면 그날 보호자동행가고, 안된다하시면 보호자동행 날짜를 바꾸려구요."

'오마이갓~ 사회 수업을 바꿔주면 그녀는 원래 계획대로 여행을 갈 수 있고 부모님의 회사 연차도 변경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회 수업을 바꿔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본인이 사회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여행의 일정을 변경할 것이다. 왜 이 선택의 공이 나에게 던져졌을까. 여행은 니가 가는데 왜!!!! 진짜 그녀의 어머니가 물어보라한 걸까? 아님 자신의 질문에 힘을 실으려고 엄마를 등장시켰을까?'

나는 결단코 사회 수업을 바꿔주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바꿔주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겨 나보다 마음여린 다음 학년 선생님이 몹시 마음이 상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하늘은 그녀의 편이었던거 같다.. 그녀가 내게 물은 그날! 갑자기 다음주 월요일의 예술강사선생님의 시간표가 변경되었고 나는 3,4교시 연달아 하려던 사회를 어쩔수 없이 다른 날로 옮겨야 했던 것이다.


여행을 다녀와 유난히 더 밝은 모습이던 그녀는.. 그날 최상의 컨디션으로 모둠활동을 했고 완성된 그 모둠의 영상은 매우 훌륭하였기에 나는 두고두고 나의 제자들에게 보란듯이 자랑할 멋진 참고자료를 얻게 되었다.


그래.. 그것으로 되었다.... 하늘은 그녀의 편이 아니라 내 편이었던 것은 아닐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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