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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준비했어, 어린이날 선물 (2탄)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게 자라렴. 명랑올림픽 1

  체육대회를 하는 날, 솔직히 조금 떨렸다.

혹시나 잊었다는 핑계로 반티를 안 입고 오는 아이가 있진 않을까.. 입기 싫다는 말 대신 잊었다는 핑계를 댄 것이면 어쩌나.. 할 수 없이 입고 와서 찜찜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진 않을까..

날카로운 카리스마의 뒤편에 손대면 터지는 비눗방울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저 나는 갈대처럼 왔다 갔다 맥없이 춤추는 또라이인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핫핑크의 아이들이 하나둘 등교한다.

내 마음도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예쁘다~ 예쁘다~ 예쁘다~~~

까불거리며 온갖 마음의 소리를 여과 없이 뱉어내던 민이도 핫핑크를 입으니 너무 사랑스럽다. 와~ 이런 맛에 내가 핫핑크를 고른 거지.(이건 아이들을 위한 선물인가 나를 위한 선물인가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든다.)


  오늘은 학년체육대회, 솔직히 처음 체육대회 계획이 나왔을 때는 조금 하기 싫었다.

운동회로도 불리는 초등학교 체육대회는 보통 일 년에 한 번 하는데 갑자기 올해부터 두 번을 한다고 하니 반감은 당연했다. 게다가 학년별로 하는 체육대회는 학년부장이 통솔해야 하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일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약간의 억울함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안 하면 안 했지, 하면 대충 하지 않는 열정 캐릭터!

  원래 계획은 5월 둘째 주였고 학년별로 1시간 계획되어 있었기에 반별이어달리기 정도로만 끝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체육대회를 나는 굳이 어린이날 직전인 5월 3일로 계획하고 뭐라도 하려면 1시간으로는 안된다는 이유로 2시간 강당사용을 예약해 버렸다.

  넓지 않은 강당에 일곱 반이 다 들어가서 할 수 있는 체육경기라면 한 종목당 반별 대표선수들이 출전하며 여러 경기를 진행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급 계획된 명랑 올림픽!

학년의 선생님들에게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냥 애들만 인솔해서 오시라고 큰소리 빵빵 쳐놓고 이틀 전부터 부랴부랴 준비를 시작했다. 오륜기의 색에 맞게 펠트지로 글자를 오리고 종목이 프린트된 종이에 아이들이 예쁘게 색칠하고 금, 은, 동 기록칸을 1m자로 쓱쓱 그어 완성된 점수기록판!

각 종목별 설명과 깜짝 퀴즈를 포함한 시나리오까지!

  준비는 완벽했으나 변수가 있다. 내가 앞에서 진행을 봐야 하니 혹시나 우리 반 아이들끼리 생길 있는 문제를 미리 방지해야 했다. 승부욕이 넘쳐 점수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급하여 혹시나 친구가 실수했을 타박하는 소리가 불쑥 나오는 3명의 승부사에 대한 교육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동심에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 한들 지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들을 아침에 따로 불렀다. 선생님과 함께 미리 강당에 짐을 옮겨놓는다는 대외적인 구실이었으나(다른 아이들이 섭섭해했다. 자기들도 옮기고 싶다고.. 미안해 얘들아.. 편애 아니야.. 너네가 커도 이해하기 힘든 교직의 고충이란다..) 강당에 도착한 뒤 그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


"너희들이 승부를 좋아하고 스포츠를 즐기며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경쟁하는 것은 선생님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이해해. 근데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기 전체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승부사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야. 오늘은 진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모든 반이 즐겁게 참여하는 게 목표야. 그래서 혹시나 경기가 진행되면서 점수가 너무 뒤처진 반이 속상하지 않게끔 선생님이 점수를 조정해 주기 위해 심판, 응원, 질서 점수를 따로 적어놨어. 오늘 너네가 수행할 비밀지령을 말해줄게. 절대 너네끼리 의논해서도 안되고 친구들에게 들켜서도 안돼. 경기가 진행되면서 금, 은, 동에 적히지 않아서 어느 반이 점수가 많이 낮다 싶으면 손가락으로 선생님에게 신호를 줘. 4반 점수가 너무 낮을 때 손가락 네 개로 머리카락을 넘기거나 5반 점수가 너무 낮을 때 다섯 손가락을 펴고 흔들거나 이런 식으로~ 할 수 있겠어?"


  그들은 마치 5학년 사회교과서의 독립투사와 같은 장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경기 내내 누군가를 탓하거나 흥분하거나 화내지 않으면서 종종 내게 수신호를 보내주었다.

나는 마이크를 들고 진행을 하는 도중 가끔 그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차분하고 진지한 그들의 태도에 감격해 당장 달려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느라 몹시도 애가 달았다.  


(명랑올림픽의 경기 내용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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