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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준비했어, 어린이날 선물 (2탄-2)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게 자라렴. 명랑올림픽 2

  올해 4학년 아이들은 정말 감정표현이 솔직하다. 숨기거나 여과하거나 꾸미는 일이 잘 없다.

아이들이 보이는 뜻밖의 반응에 내가 "오메~"라는 낮은 탄식을 뱉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도 최근에 깨달았다.

어쨌든 아이들의 솔직한 감정표현은 교사 입장에서 다소 부담스러운 점이 있는데...

특히 명랑올림픽을 앞두고 내가 진행을 맡게 되자, '얼굴 볼 일 없는 다른 반 선생님은 옆집 아줌마보다 멀게 느껴짐이 당연한 이치인데 우리반 보다 더 날 것의 표현이 오간다는 다른 반 아이들의 원망을 들으면 어쩌나? 그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 날 것이 되어 자발적으로 도마 위에 올라가 누운 것이나 다름없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강한 척 하지만 속은 연두부처럼 무른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비장한 자료조사를 시작했고..

정식 경기 전 모두가 사랑하는 스포츠인 축구를 예로 들어 국제축구연맹의 역사가 120년이지만 비디오판독시스템이 들어온 지는 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 그 조차도 승부에 영향을 끼치는 3가지 상황에서만 사용한다는 점을 아이들에게 강조했다. 그리고 내가 놓치는 것에 대한 실망과 오해를 잠재우기 위해, 잠자리는 눈이 만개에서 이만팔천 개에 이르지만 선생님은 눈이 두 개뿐이다. 잠자리가 아닌 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한계를 이해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통해 아이들의 동정표를 얻을 수 있었다.


  국민의례, 성화봉송 같은 거창한 의식은 생략하고 "이겼다고 뽐내지 않겠습니다! 졌다고 탓하지 않겠습니다!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만들겠습니다!"라는 명랑올림픽 선서를 다 함께 외친 뒤 명랑올림픽 경기가 시작되었다.


  첫 경기는 복싱!

"복싱은 두꺼운 장갑을 착용하고 오직 주먹으로만 겨루는 경기라 손에 집중력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별 출전 선수들은 양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바닥에 앉으세요. 수학교과서를 자신의 앞에 두고 양손은 무릎에 올립니다. 심판이 페이지를 외치고 호루라기를 불면 손끝에 집중력을 모아 해당 페이지를 펴세요. 가장 먼저 펴는 반 순서대로 금, 은, 동메달입니다!"

실력과 관련 없이 운에 따라 결정되는 경기내용에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첫 경기의 부담감을 고려해 각반 회장을 출전시킨 복싱경기의 결과는 당연히 운에 따라 결정되었다. 비닐장갑을 끼고 불편해진 손가락으로 빳빳한 새 교과서의 70쪽을 펴는 아이들 모습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두 번째 경기는 사격!

"사격은 타깃을 맞추기 위한 정밀한 조준이 필수적입니다. 사격 선수들이 겨룰 내용은 물이 반쯤 들어있는 물병 세우기입니다"

한때 아니 지금도 전국의 초등교실에서 활발히 이뤄지는 생수병 세우기 놀이다. 삼삼오오 모여 마시다 남은 생수병을 돌아가면서 책상 위에서 던져대는데, 떨어지면 발등 찍혀 멍든다고 하지 말라고 말려도 돌아서면 또 던지고 있어 무수한 초등교사의 골치를 아프게 만드는 그 놀이, 이제는 지쳐서 "오냐 좋다! 정 할 거면 바닥에 동그랗게 둘러앉아해라"라고 허락했던 마성의 놀이... 평소에는 잘만 하던 녀석들이 경기라고 하니 실수 연발인 모습이 오히려 귀엽게 와닿았다.


  세 번째 경기는 피겨!

"오늘 하는 경기 중 유일하게 동계올림픽 종목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연아 선수가 유명하지요. 출전 선수들은 김연아의 시그니처 동작 중 하나인 스파이럴 자세를 취하면 됩니다. 원래 이 자세는 한쪽 다리를 허리 위로 올려야 하지만 무릎 위 높이 이상 올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지지하고 있는 발바닥이 바닥에서 떨어지면 안 되고 오래 버티는 순서대로 금, 은, 동메달입니다."


투포환은 신고 있던 한쪽 실내화를 발로 차서 기준선에 가깝게 던지기, 양궁은 내 맘대로 그린 과녁에 다트 던지기(둥근 과녁 안은 10점이 최고점이었지만 하늘의 별따기란 말에 어울리게 한 쪽 구석의 별은 15점, 사람마음을 얻는 건 별따기보다 어려우니 또 다른 구석에 그려놓은 하트는 20점이었다.), 탁구는 가장 얇은 교과서인 실험관찰책으로 탁구공 오래 튀기기, 그리고 마지막 육상은 펀스틱 계주로 마무리했다. 한 사람당 한 종목에 참여했고 종목들도 다 간단했던지라 시시하다 여길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잘 따라주었고 심판이 마음대로 응원, 질서, 심판 점수를 주어도 누구 하나 시비 걸지 않고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아이들을 하교시킨 오후, 교실 앞 복도를 지나가는 다른 학년 또는 다른 반 아이들이 먼저 아는 체 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올림픽을 마친 날 많은 아이들이 열린 교실문 사이로 인사해 주었고 몇 명은 재미있는 활동을 계획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건넸다. 아.. 또 한 번 해야 하나?


어린이날 선물 1탄은 반티였고, 2탄은 학년체육대회인 명랑올림픽이었다.

대망의 마지막 선물 3탄은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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