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하늘을 걸었다

by 자백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어디로 가냐고 묻고 서로 각자의 길을 걸었다.



오늘도 나는 동네를 걸었다. 살짝 늦잠을 잤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아침을 챙기고, 전날 갑자기 추워진 탓에 사우나를 가려 했지만 귀찮게 느껴진다.


딸의 등교와 동시에 작은 해방을 느끼며 '아 오늘도 이러면 곤란한데...'라는 생각과 다르게 이미 몸은 이불속이고 손에는 핸드폰이 쥐어진다.


2년째 자발적 백수로 살고 있다. 아침에 일상은 늘 같은 모습이지만 오늘은 꼭 사우나를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킨다. 나는 사우나가 좋다. 서로 합의된 모습으로 있을 수 있으니 뭔가 해방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거기다 행위의 끝으로 다시 세상을 나가고자 할 때 힘찬 에너지를 충전받는 느낌이 든다.


사우나가 끝나고 마침 장도 볼 겸 근처 마트에 들렀다. 이것저것 새로운 식재료를 탐색하지만 결국 냉장고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늘 먹는 음식에 재료들 뿐이다. 습관이라지만 이렇게 작은 일임에도 관성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게 이제는 놀랍지도 않을 뿐이다.


요즘 날씨는 걷기에 무척이나 좋다. 가끔 오락가락하는 날은 빼고는 서늘한 바람에 가벼운 외투 하나 걸치고 걷다 보면 참으로 힐링이 된다. 때 마침 점심때가 되어 고등어구이와 갓김치를 꺼내 미역 밥하고 같이 먹는다.

먹다 보면 꼭 겨란 2개를 팬에 올려 맛소금 살짝 후추 아주 살짝 넣고 다시 점심을 먹기 시작한다. 재시작이다.


그리고 낮잠을 잔다. 참 설거지는 바로바로 한다. 어디선가 집에 들어와서 바로 샤워하는 사람, 밥을 먹고 바로 설거지하는 사람들을 독한 사람이라고 한단다. 요새는 별게 다 독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난 MBTI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귀찮기도 하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신비한 우주처럼 나도 하나의 소우주인데 어찌 그 간단한 검사로 규정지을까 싶어서다. 비록 재미로 한다지만 관련 책까지 나오는 걸 보면 하나의 흐름이겠구나 하고 가벼이 넘긴다.


오후 4시쯤,


슬슬 이불 밖으로 기어 나오려 하지만 그게 그리 쉽던가! 기어코 이불속에 있다가 현관문 비밀번호 소리에 얼른 몸이 반응을 한다. 딸이 잔소리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다. 은근히 무섭다. 간단한 간식을 챙겨주고 곧 나가는 딸을 보면서, 아침에 느꼈던 해방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리고 나는 다시 걷는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다.

새벽어둠을 지나 가득한 햇살처럼, 오후 6시에 모습 또한 농익은 색으로 풍성하다.

근처 작은 호수. 공원을 걷다가 나의 자리를 찾아 앉는다. 보는 각도가 제법 보기 좋다.

잠시 앉아 김동률에 '이방인'을 듣는다


이어폰 줄을 타고 넘어오는 음악 소리에, 순간 시간은 멈추고 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는 기분이다. 4분여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지만 노래가 끝날 때쯤 버려지는 생각들이 훨씬 더 많다.

어느새 두 발을 내딛고 다시 걷다 보면 잡념은 사라지고 주위를 볼 수 있게 된다. 좁은 시야 속에 세상이 보이이기 시작하고 나와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과 새들의 쉼터가 되어 주는 호수의 노을로 가득 차 있다.


걷다 보면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과 생각만큼 큰일이 아닌 것에 감사하게 되더라. 그렇게 내 속도를 알게 되고 결국에 내 길을 찾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고 내일도 걷는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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