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로할 때 끝에 하는 말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 쓰는 말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일까
아니면 무뎌질 때까지 버티란 말일까
시간이 약이다. 그러니 조그만 더 참고 기다리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단다.
그래서 좋은 날이 왔을까? 물론 잘 해결된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우리는 시간이 만병을 고쳐줄 수 있는 것처럼 아무 때나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의 힘이 필요할 때도 분명 존재한다. 첫 들어간 회사에서 업무 파악에 필요한 시간, 기름진 흙에 씨앗을 뿌려 물을 주고 햇살을 받아 싹이 나올 때까지의 시간, 부모의 보살핌으로 성장이 필요한 시간, 오랜 숙성으로 최상의 맛으로 테이블에 오를 음식들...
가끔 누군가를 위로할 때면 나도 이 말을 사용했던 적이 있다. 다만 뭔가 불편했다. 너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지만 너의 상처까지 보듬어 줄 수는 없어. 나도 상처투성인걸.. 그렇다고 외면할 수 없기에 이전에 사용했고 나도 누군가로부터 들어왔던 말을 해줄게.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누구나 상처를 입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비슷한 내용의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받아들여지는 당사자의 마음까지는 우리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공감을 할 수 있기에 서로에 따뜻한 말에 위로도 해주고 받기도 하고 때론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사실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보이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요즘 눈물이 많아졌다).
다시 돌아와, 위로의 끝에 하는 말이 고작 시간만 지나면 좋아질 거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일까?
우리는 내면에 아이가 있다. 걸음마를 지나 두 다리로 걷고 뛰고 다시 일어서는 아이. 그 과정을 통해 단단해지듯이 건강한 어른의 모습으로 성장을 한다. 그럼 나의 내면의 아이는 잘 성장했을까?
가족의 모습이든 우정과 사랑이라는 이름에 모습이든 모든 관계를 다 끊는 다 해도 세상 밖으로 나가면 사회적 관계가 다시 탄생하듯 관계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개인의 자아와 내면을 만나면서 잡음 하나 안 생길까. 바늘과 실처럼 관계와 상처는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시간이 지났건만 왜 치유되지 않고 상처를 품은 채 어른이 되었을까. 가끔은 완치가 된 것처럼 살지만 어느 순간 훅 튀어나와 나를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사회적 분위기(시선)
우리는 어릴 적부터 넘어지면 '괜찮아 괜찮아~라고 듣고 자란다. 공원에서 4살 아이가 넘어졌다. 그럼 부모들의 첫마디가 '얼른 일어나' , '괜찮아'이다. 이때 아이는 이렇게 받아들이게 된다
'아!! 이 정도는 괜찮은 거구나..'
둘째, 당사자의 회피 일수 있겠다
누구나 끔찍한 아픔을 겪고 나면 두 번 다시 생각도 하기 싫을 것이다. 그래서 모른 척 회피를 한다.
안 그런 척.
글쎄...
넘어진 건 나인데 나의 감정을 왜 다른 누군가가 정해줄까?
지레짐작으로 상대의 아픔에 대해 괜찮다 안 괜찮다 판단이 될까?
피한다고 정말 잊힐까?
왜 그 정도는 다 괜찮다 하는 걸까?
우리는 누군가의 상처를 물어뜯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맘 편히 속내를 내 보였다가 금세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세상은 풍요롭다고 하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경제적 빈곤이 정신적 빈곤보다 나은 것 일까?
안타깝다. 정말 슬프다. 언제까지 '나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지 가끔은 내가 AI 같을 때가 있다.
나는 울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와 마주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그때의 감정을 알게 되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때론 비겁했으며 그리고 행복했다.
구석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고 외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런 나를 안아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좋아지고 있다. 시간이 약이다.
맞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진다.
나는 용기를 내어야 만 했다. 모른 척했던 나와 화해를 했고 인정했으며 받아들였다.
아직도 그렇지 못하는 부분과는 대화 시도를 해보지만
여전히 싸우고 있다.
더 조율을 필요하겠지만 천천히 들여다 보고 손길을 건네준다면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